기대감을 내려놓은 적당한 선(線)

사람은 변하지 않고, 관계는 변한다

by Davca

꽤나 오래 직장생활을 해왔기에, 조직 내 인간관계에 있어서 기대와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는 일들 따위는 가볍게 쳐낼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해왔는데 바꿀 수 없는 저의 성격 탓으로 여전히 어려운 영역은 있습니다.

커리어의 절반 정도는 팀을 리딩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는 팀원분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정도로 가까워진 분들도 있었고, 1년을 넘게 만나도 좁혀지지 않는 심리적 거리가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결국 변하더군요.





저는 잔정이 많은 사람입니다.(아내는 이걸 오지랖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리더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보다 멘토나 조력자라는 역할이 조금 더 가깝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에게 강력한 리더십과 간결하고 명확한 지시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성장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는 큰 부족함 없이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평가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 이러한 성향 탓에, 저의 유약한 틈을 타고 이용해보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그런 것도 하나둘 보이더라고요. 당연히 좋지 않은 기분으로, '난 무엇을 바꿔야 할까'를 꽤나 오래 고민했습니다. 바보 같은 고민이었어요. 팀원들에게는 단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보다,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얘기하고선, 되지도 않을 저의 부족함 메우기에 비생산적인 시간을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더 환장하는 건, 그 노력이 스스로의 발전과 개선이 아닌 '관계'의 원만함을 기대했던 저의 바람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모두의 인정을 받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 겁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이에 대한 역효과는 너무 많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거였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기 위해서는(다시 한번 생각해보지만, 이건 정말 불가능합니다) 우선 나의 생각과 주장보다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동조하여 힘을 보태고 있다 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야 했고, 지금 와서 보면 그걸 상대방이 알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존재가 고유함이 아닌 공공성을 띈 중간자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런 희한한 존재가 되어 갔어요. 주도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한건 어느 누구도 그걸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왜 그렇게 지냈나 싶어요. 혹여나 저와 비슷한 마음으로 회사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지낸다고 누가 날 알아주지도 않지만,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 때 '내가 날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조차도.





꽤나 오랫동안 같은 조직에서 업무적으로 그리고 업무 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관계란 늘 그렇듯, 한없이 좋을 땐 더 말할 나위 없는 따뜻한 기류가 흐릅니다. 서로에게 아주 좋은 환경적 요건이 갖추어지니, 관계가 무르익어 간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꽤나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서로에게 보이지 않게 투입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이지요. 사회생활을 통해서, 그것도 직장에서 만난 인연인 경우, 그 '관계'에 변수가 될만한 요소들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며 바로 조직입니다. 조직의 생태계는 이동과 변화를 전제하고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람입니다. 오해와 불신의 가능성은 늘 있습니다. 상호 간에 모두 그 가능성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정도의 깊고 깊은 사고와 배려의 틀을 배경으로 하여 맺어진 연이 아니라면 언제든 관계는 변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데, 관계가 변하기에 우리는 더 상처 받고 괴로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의 변화에 따라 나도 변하면 적어도 슬픔의 크기를 줄이고, 지금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경험해 본 가장 좋은 솔루션은, 서로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적당한 선(線)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게 정말 어려웠어요. 지금도 사실 어렵습니다.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팀원들에게는 인간적인 교감을 통해, 성장의 방향마저 제시해주고 싶은 충동이 강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충동을 다른 쪽으로 발산해서 저의 소명을 다하겠지만, 녹을 먹고 있는 입장에선 관계가 아닌 주어진 역할에 좀 더 몰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해보려 합니다. 물론 그 항해 역시 육아휴직이 끝난 이후가 되겠지만, 그때를 위해서 제 마음에도 갑옷 두어 개쯤은 입혀두어야 할 것 같아요. 튼튼한 놈으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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