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잡담
커피 한 잔 먹을 때도 별난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 아침에 마실 때와 저녁에 마실 때 영양학적 가치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감정의 분비물은 분명히 다르다. 뜨거울 때와 식었을 때 감각만큼의 차이가 난다.
찬 공기와 커피의 뜨거운 김이 만드는 기체의 앙상블을 바라보며, 한참 멍 때리는 것으로 하루의 아침은 시작된다. 육체는 분자들의 활동으로 작동되는 시스템이다. 오늘의 분자운동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직 활동하기에는 시간이 이르다.
해서 나는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어떤 에너지를 선택할 것인지 잠깐 고민하기는 하지만 의미는 없다. 공급할 에너지는 이미 싱크대 위에 놓여 있다. 라면이다.
비닐봉지를 뜯고 내용물을 꺼낸다. 지렁이들이 몸부림치다 뭉텅이 된 모양의 단백질 덩어리, 그것을 냄비에 넣으려다 말고 다시 의사결정을 검토해 본다. 밥 말아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반만 넣을까?
냉장고를 열고 먹다 남은 탄수화물이 있는지 확인해 본다. 탄수화물은 없고 완전식품이라는 닭알이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이 든다. 애용하는 육류이기는 하지만, 세상 빛을 한 번 구경도 못 해 보고 다른 유기체의 소화기관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것의 운명이 안타깝다.
냉장고 안을 둘러보지만 넣을만한 것이 없다. 안타깝다. 그러나 안타까운 닭알의 운명을 냄비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 안타깝다. 물은 끓어 오르고 나는 단백질 덩어리와 함께 안타까운 운명에 처해 진 그것을 깨서 냄비에 넣는다. 그리고 번들로 들어있는 양념을 털어 넣고 책상으로 돌아와 어제 찾다 만 낚시용품을 검색한다.
요즘 물고기들 지능이 예전 같지 않다. 진화 속도가 빨라진 것일까? 떼 지어 다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정작 낚싯대에 걸리는 놈은 없다. 실력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실력이 없다고 미끼 맛이 상하거나 변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저 하등생물들이 낚시꾼 인품을 봐가며 미끼를 무는 것은 아닐 테고.
한번은 월척 몇 마리 건진 낚시꾼에게 미끼를 얻어 던져보기도 했지만, 내가 가져왔던 미끼나 별 차이가 없다. 위치가 문제인가? 그러나 10m 옆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놈들이 올라온다..
미끼에 꿀이라도 발라나 하나? 실력도 아니고, 위치도 아니고, 미끼도 아니고, 낚시 장비는 다 거기서 거기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안 나온다. 아! 역시 낚시꾼 인품이 문제인가 보다!
검색하던 사이트를 덮어 버린다. 어떤 물고기도 속아 넘어간다는 상품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 당분만 낚시보다는 마음 수양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기로 한다. 모든 일에는 정결한 마음이 우선이라고 하지 않는가?
조용한 방안에 이상한 낌새가 감지된다. 무엇일까? 잠깐 두리번거리다 이내 내가 요리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방에 가보니 냄비가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잠깐 사이에 시간이 벌써 20분이 지났다. 분명 하나만 넣었는데 부피가 두 개 분량으로 늘어나 있다. 국물은 보이지 않고 바닥에 누룽지가 붙어 있다.
그래도 어찌하랴? 김치를 꺼내 다소곳하게 식탁을 차린다. 라면의 글루텐조직이 완파되어 젓갈로는 잘 집어지지 않는다, 숟갈을 가져와 식도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무슨 푸딩을 먹는 기분이다.
요즘은 명상인지 망상인지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져 간다. 물론 그중에는 낚시할 때 고기들에게 농간당하지 않기 위한 정신수양도 포함되어있다.
낚시에서 잡은 고기들은 주로 유튜브를 보고 요리한다. 유튜브에서 알려준 대로 재료를 섞어 끓인다, 결과물은 분명 매운탕인데 얼큰한 맛은 안 나고 매운 양념 맛만 난다. 결국 국물은 버리고 고기만 꺼내서 먹는다. 제대로 된 매운탕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지금은 구워서 먹는다.
먹고 나면 산책간다. 집 근처에 산책길이 두 군데가 있다. 해안도로를 끼고 있는 산책로가 있고, 대나무숲과 공원으로 꾸며진 산책로가 있다. 두 산책로 모두 해안가를 끼고 있어 장승포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산책로를 거쳐 방파제를 돌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린다.
낮에는 미라처럼 비실비실하다가 저녁에 생생해진다.
천성이 야행성인가 보다. 전생에 들쥐나 바퀴벌레였을지도 모르겠다. 유튜브를 보거나 글 쓰는 일도 대부분 저녁때 이루어진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과거에 읽었던 책들의 흔적을 찾아가며 되새김을 하거나 정리하기도 한다. 지난날 나의 잘못된 판단과 잘못을 생각하며 달라졌을지도 모를 시나리오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때 판단이나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 어떻게 되어있을까?
아무리 시나리오를 각색하고 뒤바꿔 봐도 인생의 후반부 그림은 누구나 비슷하게 나오기 마련이다. 재벌 회장이라고 다가오는 무덤에 당당할 수 있을까? 천하를 차지한 진시황도 초조해서 찾았던 것이 불로초였다.
큐리오시티가 찍었다는 화성 사진을 본다. 생명체가 없다는 점만 다를 뿐,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봉우리들은 지구의 황량한 대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지구의 운명도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유기물 투쟁이 존재하지 않는 무기물의 세계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먼 훗날 아름다운 그런 곳에서, 한때 매운탕 에너지로 살아남았던 분자들이 뛰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냄비에서 끓여졌던 안타까운 닭알의 운명 한 조각도 그 틈에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일까? 멸치 내음 나는 바다와 매일 걸었던 산책로와 방파제, 지난날의 회한과 슬픔, 퇴적된 시간에 남아있는 삶의 흔적들도 모두 기화되어 우주 공간을 떠도는 먼지의 신분을 갖게 될 것이다.
훗날 우리는 전신마취된 환자처럼 감각과 의식이 사라져 기억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 마지막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성냥개비 하나의 화학반응과 같았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이별의 감정이 최후의 의식과 부딪치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미래에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입자들을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언제 사랑할 것인가?
아직은 죽지 않았기에 지금 함께 있는 감정의 입자들을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 쓸쓸한 방과 먼지 쌓여있는 시간들, 먼 곳에서 날아와 지쳐있는 어둠 속의 별빛들, 그들이 스러져가기 전에 나는 무언가를 하기로 한다.
해서 조촐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대가리를 떼어낸 멸치와 소주를 준비한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주(酒)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켜보고 있는 허공의 친구들과 건배한다.
한 잔은 나로 인해 겪었을 모든 슬픔을 위해
한 잔은 나의 잘못으로 상처받았을 사람들을 위해
한 잔은 지구에 있는 유기물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한 잔은 냄비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닭알의 운명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아무 죄없이 대가리를 잃은 멸치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