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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감정

by 그냥잡담

니체 감정


니체는 철학적 질문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존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객체보다 주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도발적인 사상은 급기야 "신은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신에 종속된 인간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신에 의해 규정되어 진 인간의 속성을 파괴하였다.

그가 작업하고자 했던 것은, 신이란 관념이 제거된 독립적인 인간의 존재, 신이란 불순물이 씻겨나간 순수하고 정결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니체는 독자들에게 불순한 것에 오염되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성경을 넘기라고까지 말한다. 아마 당시에는 까무러친 독자도 있었으리라.

이것은 당시 유럽의 종교, 문화, 역사, 모든 사상적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반역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도 출판해 줄 사람이 없어 자비로 출판해야만 했으며, 고작 40부를 팔았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 자신도 한때는 목사가 되기 위한 신학생 신분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철저하게 고독했다.


고독한 반항!

그가 투쟁하고자 했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 그 본래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해 신이 제거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인간이 비로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니체는 스스로 “망치로 철학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선사시대 이래로 많은 망치질이 있었을 테지만, 인류 역사에서 니체처럼 위대한 망치질이 있었을까? 역사, 철학, 정치, 종교, 도덕, 윤리 등등 그가 기물 파괴한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가치 있고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들은 하나같이 니체의 망치에 두들겨 맞는 처지를 면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두들겨 맞은 것은 종교적인 神일 것이다. 니체가 생각하기에 神이 제일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것은 신념의 우상이자 유럽의 심장이었다. 神을 폐기함으로써 니체는 종교라는 집단농장에 갇혀있던 인간, 神의 노예로 예속되어 있던 인간을 해방시킨 셈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기계나 다를 바 없다. 고장(생로병사)이 잘 나는 불완전한 기계다. 그런 불완전한 기계(인간)가 완전한 제품(진리)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기계가 만들어 낸 이념은 정도는 다를지언정 불량품(구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니체는 진리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은 모두 인간의 주체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울타리로 간주한다.

진리라고 자처하는 종교들, 가령 불교나 기독교만 봐도 지켜야 하는 계율이나 지침이 얼마나 많은가? 히잡 제대로 안 썼다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정도니, 순교라는 이름으로 목숨마저 쉽게 앗아간다. 진리라고 과장 광고된 선전에 유혹되어 제물이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니체의 망치질이 필요했던 이유다.


니체는 신비주의를 배격한다. 신비주의는 남을 등쳐먹기 딱 좋은 수단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 누구도 모르니까. 보이스피싱에 넘어가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즉 신비주의는 연출만 잘하면 실수 없이 사기 치기 딱 좋은 방식인 것이다.

논리와 판단력이 높다고 신비주의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지질학 박사학위가 있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치자. 그는 지구가 45억 년 되었다는 지질학적 지식을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지구가 6000년밖에 안 됐다는 신비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실제로 이런 종류의 종교인들이 많다. 과학이 발달하고 논리와 판단력은 높아졌어도 인간의 심리는 여전히 원시시대 두뇌에 머물러 있다.

천국과 지옥이 신비주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천국을 바라거니 또는 지옥이 무서워 그 믿음에 빠지곤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신비주의 함정이다. 함정을 그렇듯 하게 파 놓으면 누군가는 빠지게 마련이다. 당연히 니체가 망치를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순간순간이 영원하다는 전제로 삶을 살라고 제안한다. 당신이 영원히 산다고 가정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남의 노예가 되어 무기력하게 영원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창조적인 삶으로 영원을 보낼 것인가? 이 영원회귀 사상에서 후자의 삶을 사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부른다.

영원회귀는 윤회 사상처럼 죽은 다음에 生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사는 生을 그 같은 상황에 놓고 살라는 것이다. 인생은 단 한 번 뿐이기에 니체의 초인사상은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기도 하다. 니체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그러나 신비, 환상과 동거하는 이는 노예의 삶으로 생을 마치게 된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못했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도 무기력한 영원이 함께할지도 모를 일이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때 죽어도 좋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을 때 나는 니체를 생각한 적이 있다. 방향도 없고 길도 없는, 황량한 바람만 날리는 메마른 행성과도 같은, 그 쓸쓸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니체도 그러지 않았을까?

존재의 후견인으로서의 신, 그 자체를 저격해 버린 니체의 세계, 그것은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고독하고 쓸쓸한 세계이다. 그것은 쓸지 않은 눈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신의 발자국이 아닌 인간의 의지, 스스로 존재성을 자각한 발자국을 내는 것과 같다.

혼자 걷지만, 그러나 초인의 의지를 가진 자는 고독하지 않다. 그 자신이 든든한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자는 초라할 수밖에 없다. 노예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 불안과 동반할 수밖에 없기에.

뜨거운 고뇌와 고독한 신념, 광기적 반항. 니체는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독자들에게 외친다. 그러나 100년이 넘도록 전염되어 온 니체 바이러스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아니, 니체 백신이 만들어질 수나 있을까?



온통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우중충한 일요일. 고독에 서린 니체의 광기가 느껴진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아무도 없는 북극 설원을 홀로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되든, 설원에서 사라져 없어지든, 그 결과마저도 신이 아닌 인간 스스로 문제라는 사실을 니체는 간파한 것이 아닐까?



B02. 니체 감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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