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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잡담 Feb 09. 2023

기독교 감정

    

 

며칠 전, 내 관심사도 아닌데 유튜브 알고리듬 추천 영상이 올라왔다. “기독교 테마공원 분양 논란” 제목이었다. 천안시에 137m짜리 예수상을 세우고 주변을 테마공원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천안시 관계자가 말하길 허가 사실이 없는 사기 분양이란다.

사실 전에도 신천지 피해자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신천지 피해자가 밝힌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렇게 무지한 집단도 있는가 싶었다. 무지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사기 수준이다.

순수한 종교적 신념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신천지 경우는 보이스피싱 집단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얼마나 교묘하게 사기를 치기에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일까? 오늘날 기독교 행태가 비단 신천지뿐일까? 

하긴 하늘을 믿든 사기꾼을 믿든 개인의 신념 문제지만...

“종교”를 팔아먹는 사기 행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마침 잡담 쓸 것도 없고 해서 기독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쓰기로 했다. 지식이 짧아서 버틀란트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니체 <안티크리스트>의 상당 부분을 참고했다.    



 

기독교 감정  

          

기독교 철학에서 神의 존재를 설명하는 단골 소재 하나가 있다.     


 『만일 당신이 길을 가다가 시계를 주었다면, 그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당신이 그 시계공이 누군지 모른다고 해서 그 시계가 저절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원인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존재의 근원은 원인에 있다. 따라서 이 우주 만물도 그 무엇의 원인이 있을 것이며, 그 무엇의 원인이 바로 神이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인과율(因果律) 법칙이다.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는 위의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이 논리는 반대로 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명으로도 가능하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는 전제가 타당하다면, 神 역시 그 존재의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해놓고 神만이 원인이 없다고 한다면, 이 논리는 일관성이 결여된 치명적인 오류를 갖는다. 오류를 바로잡고, 기독교의 인과율대로라면.

神이 있다면 神을 만든 창조자가 있어야 하고, 神을 만든 창조자가 있다면 그것을 만든 그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있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존재하게 만든 존재가 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논리의 전개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무한수열이 되고 만다.

답이 수렴되지 않는 논리는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종교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추상적 이념이다. 논리적 설명 없이는 설득력이 먹히지 않기에 중세 신학자들은 철학적 해석을 통해 기독교 섭리를 설명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신학대전을 집필한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아퀴나스 논리는 억지로 기독교 사상에 맞춘 탓에 인과율(因果律)과 같이 논리적 오류가 수두룩하여 이를 비판하거나 지적한 사례는 수없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튜브를 보면 기독교 사상을 논리 혹은 과학으로 설명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중세가 아닌 오늘날에도 판을 치고 있다.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善인 神이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神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도 역시 완전한 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질문과 관련되어 기독교의 善惡論은 이렇게 설명한다.     


 『神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고 순수한 善이다. 처음엔 인간도 神의 형상을 닮아 순수한 善이었다. 그러나 천사가 타락하여 惡(마귀)이 되었다. 그 惡의 유혹으로 인하여 인간은 불완전한 善, 곧 원죄의 씨앗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神은 천사도 창조하지 않았던가? 태초에 神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천사를 타락시킨 惡은 어디에서 왔는가?

神은 순수한 善이니, 惡을 창조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惡도 神과 마찬가지로 원인 없이 스스로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惡이나 神이나 대등한 존재자가 아닌가?

이 의문에 대해서 스콜라철학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고 적당히 얼버무린 상태로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그 논리는 여전히 기독교에서 교리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맹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타당성이나 논리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켜 버리는 오늘날의 기독교 철학! 그것은 진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비판했다.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매우 악했다. 어느 시기에 종교가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이 깊을수록 잔인성은 더했고 사태는 심각했다. 역사상 중세시대의 신앙이 가장 두터웠지만, 그때의 잔인성은 어느 시대보다 잔인했다. 종교재판의 고문은 극에 달했고 수많은 여성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잔인성이 가해졌다.”   

니체도 비판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의 잔인함이 그리그도교적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와 박해하려는 의지도 그리스도교적이다.”

러셀과 니체의 비판이 지나간 역사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끔 튀어나오는 뉴스를 보면,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과 이기주의적 배타성이, 그것이 종교인지 사이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천지창조와 아담 이야기는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대문명에는 어느 지역에나 창조신화가 있으며, 성경은 그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수메르 신화의 판박이다. 거의 그대로 베낀 듯이 내용이 흡사하다.

특히 천국과 지옥은 조로아스터교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민희식 박사 “성서의 뿌리”에 보면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3대 종교가 모두 조로아스터교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한다. 즉 조로아스터교를 베꼈다는 뜻이다.     

“아담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과 “곰이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라는 것과 “김알지가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이런 신화를 믿어야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곧 건강이 걱정되는 사람들한테 엉터리 싸구려 건강보조도구를 팔고, 미래가 걱정되는 사람에게 점쟁이가 점을 치고 부적을 팔아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학자가 물건을 만들 때 최소한 그 물건의 용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TV를 만들었는데, 화면이 안 나오고 소리도 안 나오면 그게 TV인가? 만일 인간을 TV라고 해 보자. 그것을 신이 만들었다면 신의 지능지수는 측정할 필요도 없이 저능아 수준이다.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왜 인간을 그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을까? 역사 이래로 전쟁과 살인은 멈춘 적이 없고 신정국가에서 종교전쟁은 더 심했다. 특히 마녀사냥이나 아우슈비츠 같은 상황을 보면 인간은 차라리 악마의 작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인간을 만든 이유도 수상하다. 신이 숭배를 받고 싶어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뭐가 아쉬워서 숭배를 받으려고 할까? 숭배받지 못하면 애들처럼 삐지기라도 하는가? 하긴 그리스로마신화에 보면 삐지는 신들이 있기는 하다. 애당초 숭배에 충실한 로봇을 만들었으면 될게 아닌가?

숭배받는 것은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이나 좋아하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이 정한 규칙들은 독재자들이 정한 억압적인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신의 율법이라며 오만가지 계명으로 인간의 본성을 탄압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을 보면 안다. 히잡 제대로 안 썼다고 사람을 죽이는 판국이다.


신은 성질부터가 잘못되었다.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먹은 사람에게 저주를 내린다. 원인 제공은 자기가 해놓고 인간에게 벌주는 식이다. 이런 얼토당치 않은 사건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내가 봐도 원죄는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다. 어른이 덫을 놓은 것과 어린아이가 그 덫에 걸린 것을 비교해 보라. 누구 죄가 더 큰지. 신의 규범이라는 것이 이런 몰상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뱀이 하와에게 말을 했다는 것부터가 니체로 하여금 한 숨 나오게 했을 것이다. 그때는 동물들이 모두 말을 했던 모양이다. 어떤 언어였을까? 고대 히브리어?   

 

신이 정한 규칙대로 살면 인간의 삶은 유지되지 못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한다. 구약 레위기는 책 하나가 몽땅 율법이다.

1장: 번제에 관한 규정

2장: 곡식예물에 관한 규정

3장: 친교제에 관한 규정

4장: 속죄제에 관한 규정

5장: 속죄제를 드려야 할 죄목과 제물 바치는 규정

6장 ~ 7장: 각 제사를 드리면서 사제가 지킬 조항

키워드만 봐도 그 옛날 제사장이나 무당의 업무규칙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은 인신 공양을 했던 잉카나 아즈텍에도 있다. 성경이 일점일획 거짓 없는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이 중에서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만 한다.

    

기독교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양심을 자본으로 죄를 양산하는 생산 공장처럼 느껴진다. 십계명을 만들고, 계율을 만들고, 중세시대에는 마녀사냥을 위해 수많은 죄가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졌다. 이 세상에 죄가 없다면 기독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죄인이 없는데… 그것은 곧 기독교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많은 죄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죄가 많이 생성되어야 기독교의 역할이 분명해지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종교의 권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의 출생은 축복이고 기쁨이며 자연의 크나큰 선물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죄인이 된다. 왜? 태어날 때부터 원죄라는 죄목을 피할 수 없으니, 따라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했으니, 기독교인이 판사가 되는 것은 대역죄인이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를 도우라 했으니, 교회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용서받지 못할 큰 죄다. 옆집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유부남이 옆집 여인을 짝사랑하는 것은 죄이다.

행동이 아닌 마음만으로도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왜 기독교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까지 죄로 규정하는가?     


사자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하마가 풀을 뜯고, 거미 새끼가 제 어미의 몸을 갉아먹고 성장하는, 그 모든 생명적 본능은 善惡을 따질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참다운 善이며,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 역시 다른 생명과 다를 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참다운 善을 왜곡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비트는 독선과 위선, 그것이 곧 기독교의 생존 역사였다.     


오늘날 종교라는 집단농장은 하나의 사업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대형 건축물은 늘어가고, 그 점포는 커피숍만큼이나 많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확실히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의 동물이다.

기독교 마케팅은 별거 없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얻어 영생의 욕망을 채우려 했듯이, 영생을 꿈꾸는 인간의 허황된 욕심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또한 지옥으로 겁을 주고 천국으로 회유하는 상술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잘 먹히는 주요한 마케팅 수단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까지 죄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출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죄가 몇 개 없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적어져 면죄부가 잘 팔리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물론이고 심리적인 죄까지 일일이 규정한다. 거미줄이 크고 넓을수록 먹이가 잘 걸려들지 않겠는가?  

   

기독교는 인간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세뇌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종말을 맞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때문에 천국과 지옥, 그 갈등 심리를 최대한 이용한다.

이슬람에서는 “성전에서 전사하면 죽어서 72명의 처녀와 함께 살게 된다 “는 보상심리를 전쟁에 활용한다. 이 선전에 속아 이슬람 전사들은 자폭 자살을 서슴지 않는다. 천국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예전에 다미선교회 "휴거 사태" 때 신도들이 집 팔아서 교회에 몽땅 헌금했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 천국의 유혹을 십분 활용한 예이다. 오늘날에도 십일조나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강요하지 않는가? 규모만 다르지 수법은 거기서 거기다.     


지옥은 반대로 공포감을 심어 준다. 인간의 가장 약한 심리, 취약한 감정을 건드려 믿음에 충실하도록 가스라이팅을 가한다. 계곡 살인 "이은해 사건"을 안다면, 기독교 심리 전술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다. 이것은 내가 신천지 피해자가 밝힌 내용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상적인 판단을 잠재우기 위해 기독교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병을 치료하는 기적이나 신비주의, 심령주의, 방언 계시 등등 논리가 통하지 않는 수단을 통해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한 판단력 상실, 취약한 인간의 심리에 의존해 기독교 신앙을 지켜낸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 사함”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장담하건대, 창조주는 善한 인간을 원치 않는다. 만일 완전하게 죄 없는 인간이 있다면, 창조주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죄가 없다면, 반기독교적인 인간이며 이단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善은 오직 창조주뿐인데, 또 하나의 완전한 善이 있다면 창조주와 대등한 관계, 곧 창조주의 유일성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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