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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잡담 Apr 16. 2023

굴비

- 오탁번 시인을 추모하며 -

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녁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얼마 전 오탁번 시인 별세 소식을 들었다.

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또 하나의 별이 졌다. 마음의 별이 떨어질 때마다 오랜 친구와의 작별처럼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물론 그와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작품으로만 알 뿐이다. “굴비”라는 시로 단번에 그는 나에게 별이 되었다. 그 옛날 중광이나 마광수, 천상병, 한하운 시인처럼.

그들은 의사보다 더 진솔한 해부학자들이다. 의사는 육체를 해부하지만 그들은 의사가 해부하지 못하는 것들을 해부한다. 언어의 메스가 수술 도구보다 예리할 때가 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에 감정 프리즘이 모두 같지는 않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이문열 씨와 마광수 교수처럼.

     

이문열 작품은 대체로 무겁고 교육적이며 유교적이다.

반면에 마광수 교수는 가볍고 19금 적이고 감각적이다 못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두 작가의 색깔이 극과 극이기 때문에 독자의 호불호도 극과 극으로 갈릴 수밖에 없다.

나는 마광수 교수 편이다. 이문열 씨는 사회적 통념을 문학작품으로 승화하는데 천재성을 보인다. 그러나 문학은 사회적 가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유용성은 옷을 입은 인간성보다는 발가벗겨진 진솔함을 파헤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과학자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처럼, 새로운 인간을 만들고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새로운 감성의 창조물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문열 씨보다는 마광수 교수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마광수 교수,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다. 100년 후에 주목받을 작품을 이 시대에 내놓았으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 감각이 100년 이상 후져 있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오탁번 시인이 특별한 이유는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이다.

국민학교(초등) 때 우리 집 반찬은 언제나 김치였다. 배추김치, 김치찌개, 김치뭇국... 고기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넉넉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모친이 조기(굴비)를 한 광주리 가득 머리에 이고 오셨다. 아침 댓바람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날부터 반찬은 계속 조기만 올라왔다. 조기구이, 조기조림, 조기찌게... 간식도 먹을 게 없다 보니 조기를 연탄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집에 있는 조기가 다 먹어갈 즈음에 모친이 또 조기를 한 광주리 가득 머리에 이고 오시는 게 아닌가?

조기 반찬 랠리가 계속 이어졌다. 생선 비린내가 역겨워지고 질리기 시작했다. 통통한 알만 건져 먹다 혼나기도 했다. 조기에 몸서리쳐질 때쯤 드디어 그 끝을 보게 되는 날이 왔다. 한 달 내내 먹던 조기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겼다. 반찬은 다시 원래대로 김치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는 조기 새끼 한 마리 구경 못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가 조기 대풍년이었다. 시장에 조기는 넘쳐나고 미처 다 팔리지 않은 것을 모친이 땡처리하듯 헐값에 사 온 것이다.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얼마나 진솔한지 나는 이 문장이 성경책 전체보다도 위대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 김삿갓이 있다면, 김삿갓 본인과 오탁번 시인일 것이다. 그의 시는 김삿갓 못지않은 해학의 인간미가 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생물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한 생명체이며, 신이 창조한 만물의 영장이며, 차원이 다른 고등생명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착각과 망상 속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인간성, 도덕과 윤리로 가장한 위선이 우리 사회에 암세포처럼 퍼져있다. 단적으로 성직자 성범죄가 그것을 보여 준다.     


박테리아나 인간이나 세포분열하는 메커니즘은 똑같다.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해 특별하고 위대하고 영험한 존재라는 사실적 증거는 어디에고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것임에도 다르다는 인식에서 위선이 나오고 거짓이 파생된다. 종교집단에서 그 특징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먹고 생식하는 생물적 본능은 수학으로 치면 공리와 같은 것이다. 이것에 기초하지 않은 도덕과 윤리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그 어떤 이념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히잡”이 인간의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물적 본능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오늘날 “신”이라는 히잡은 여전히 존재하고, 일부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라며 그 위선 속에서 울고 웃는다.     


배가 고파도(이삭이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사랑(수수방아)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갈망하는 행복의 그 무엇이다. 그의 시에 해석을 붙이는 일은 정말로 쓸데없는 일이다. 의미를 붙일수록 사족만 늘어난다.

그의 시는 해석이 필요 없다. 박테리아가 읽어도 이해가 가능하고, 인간이 미생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거기에 덤으로 김삿갓의 풍미까지 얹었다. 여기에 윤리나 도덕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인간은 “어찌 미생물 따위를 인간과 비교할 수 있으랴”라는 우월 의식이 있지만, 반대로 지구에 수십억 년 전부터 있었던 미생물은 “어찌 갓 태어난 인간 따위를 미생물과 비교할 수 있으랴”라는 입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틀렸다. 둘 다 같기 때문에 둘 사이에 입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반짝인다고 위대할 것도 없고, 덜 반짝인다고 초라할 것도 없다. 다 같은 물질적 존재들이고 똑같은 물리법칙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들 사이에 입장이 있다면 자기만 ”특별한 법칙“이 적용되었다는 오만함이 있을 뿐이다.     


인생 그냥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로써, 그냥 사는데 까지 사는 것이다. 사는 방식에 잔머리 굴릴 필요까지는 없다. 어떻게 살든 박테리아나 인간이나 다시 유기물로 돌아가는 결과는 다르지 않다.

유기체 최고의 행복,  고통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자연의 양심을 잃지 않는 것, 자연의 본성에 거슬리지 않고 더불어 사는 것,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듯 부지런히 사랑하는 것.

도덕과 윤리가 본능의 행복 위에 있지 않다는 마광수 교수의 지론을 “굴비”가 대변해 주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불현듯 굴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늑한 세월의 비린내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지금 밥상에 굴비가 있다 해도 내가 기억하는 비린내는 아닐 것이다. 정말로 내가 사랑했던 비린내는  닿을 수 없는 시간의 저편에 자린고비처럼 매달려 있다. 제는 구수한 비린내 풍기던 시인마저 떠나고 없다.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앞으로는 안 했어요” 말했지만, 정말로 앞으로는, 진솔하도록 웅큼했던 그 굴비장수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하고, 문학의 슬픔마저 느껴진다.        

 


                

사진 출처 :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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