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종교가 타락한 사회를 걱정했지만, 오늘날에는 반대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JMS 기독교복음선교회, 오대양 박순자,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신천지 등 이미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기독교 사이비 집단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정통 교회라고 다를 것이 없다. 정치 개입, 부동산 알박기, 알뜰폰 사업하는 목사(전광훈)가 있다면, 그 사람은 성직자인가 사업가인가 사기꾼인가?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조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봉은사 폭력사태를 보면 그들이 중인지 조폭 집단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PD수첩 “큰 스님께 묻습니다”를 보면 불교의 도덕적 타락에 충격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망해가고 타락한다 해도 의인은 있는 법이다. 숨겨져 있는 별들로 인해 세상은 멸망에 이르지 않고 지탱해 간다. 고승열전을 펼쳐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러한 별들을 만나볼 수 있다.
고승이 아니더라도 우리 시대에 같이 숨 쉬고 살았던 별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든든했던가? 세상이 타락하고 망해간다 해도 그들이 있는 한 우리는 희망을 놓지 않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별이 깊은 산속에 숨어 산다 해도 그 빛은 세상의 심리적인 버팀목이 된다.
유튜브에서, 나와 사고방식이 가장 비슷할 것 같은 사람을 발견했다. 법륜스님이다. 고승들의 법문을 찾아서 듣다가 우연히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다.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이 놀라게 된다. 물론 세세한 각론까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인이기는 해도 그의 말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종교를 떠나 그의 말은 충분히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불교 사상을 일반적인 가치로 전환시킨 그의 천재성이 느껴진다. 그는 승려라기보다는 교육자에 가깝다. 그만한 식견을 가진 교육자는 정말로 보기 드물다.
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닿은 이야기는 “길가의 풀잎처럼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굴비”에서 “박테리아나 인간이나 세포분열하는 메커니즘은 똑같다”고 말한 것이나 거의 같은 의미다. 또 나는 “운명속에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었다.
『죽고 사는 건 씨앗의 운명과 같다. 어느 것은 흙에 떨어져 잘 자라고, 어느 것은 물에 떨어져 그냥 썩고, 어느 것은 바위에 떨어져 자라다 죽고, 어느 것은 새가 먹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의 운명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운명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운명속에서- 』
법륜스님의 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길가의 풀잎처럼 살라”는 말을 내가 해석해 놓은 듯하다.
그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를 강조한다. 나 또한 자연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생명체로의 의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양심은 남의 불행이 자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인과응보나 자연의 양심이나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별반 차이가 없다. 서로의 신념도 비슷한 셈이다.
생각은 비슷할지 몰라도 생활면에서 법륜스님과 나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낚시 같은 살생이나 주식 같은 도박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수행자가 아니기 때문에 참선이나 예불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생활이나 처해진 환경은 다르지만 둘 다 “길가의 풀잎처럼” 살아가는 마인드는 다르지 않다. 기름진 땅에 떨어진 풀잎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길가에 피어난 것을 서운해하지 않는다.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참으로 다양한 인생들이 존재한다. 모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법륜스님의 해법 중 하나는 “절대성”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자기만 특별나고, 자기가 최고고, 자기가 무조건 옳다는 우월성에 문제가 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다.
질문자 대부분은 “길가의 풀잎” 마음이 없는 것이다. 풀잎이 의미를 나무만큼의 가치를 가지려 들 때 불행은 시작된다. 나는 “삶의 의미”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굳이 삶의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의미가 없는 것이 삶의 의미다. 의미가 없음에도 삶을 살아가는 의지가 인생이고, 의미가 없음에도 살아가는 용기가 삶의 희망이다. 삶에 의미가 없기에 죽음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자살로 일찍 죽을 이유도 없고 삶에 지나친 기대를 할 이유도 없다. 의미가 없기에 의미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존재로서의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의미”라는 책무가 없기 때문에. -삶의의미-』
물론 내가 쓴 글을 법륜스님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과 “길가의 풀잎처럼 살라”고 말한 뜻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본다.
“의미”에는 무언(無言)의 강요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 기반이 아닌 추상적인 목적을 가진다. 그것을 위해 개인의 삶과 자유는 축소되고 이념의 노예가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이 극대화된 사례가 사이비 종교일 것이다. 같은 인간임에도 교주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신으로 만든다. 삶의 의미를 “천국”에 두고 모든 것을 투자하도록 만든다. 의미라는 굴레에 옭아 매여 모든 것이 희생되는 무의미한 일들이 벌어진다.
나는 자연과학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는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생각하는 모형이 비슷하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그의 강연 중에 무지(無知)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불교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두려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이 뭔지 모르는 무지가 불안의 실체라고 말한다.
가령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즉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無知) 사실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여러 가지 해결 방법들이 만들어졌다. 윤회, 천국, 지옥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처방들은 심리적인 불안을 잠재우는 대신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여 인간을 이데올로기 노예로 삼는 부작용도 생성되었다.
실상을 정확히 안다면,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지식으로는 종교에서 말하는 추상적인 개념들은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을 믿는 이유는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다.
“무지(無知) 때문에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법륜스님은 말한다. 그와 관련하여 나는 예전에 이런 글을 썼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위협이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그 두려움을 환상(천국,지옥)으로 대체함으로써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삼는다.
과학이 발달하고 논리와 판단력이 높아졌어도 비논리적인 종교는 여전히 굳건하다. 그 이유는 애니미즘으로부터 시작된 수천 년의 익숙함, 포기하기 힘든 환상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칸토어 감정-』
『엔트로피의 또 다른 정보는 생명에 대한 모습이다. 생명은 확률밀도 특정값에 의해 발생된 현상이다. “특정값”은 평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지구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구 질량을 100으로 봤을 때, 지구에 있는 생명체 전체의 질량은 지구의 0.0000001%도 안된다. 비율만 놓고 봐도 지구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무생물이다. 생명체는 극히 예외적인 비정상적인 상태다.
따라서 자연에서 무생물(죽음)이 가장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상태다. 이것은 곧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엔트로피-』
법륜스님은 불교 철학에 기반하여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한 반면, 나는 물리학 지식을 기반으로 그와 똑같은 답을 도출했다. 신기하지 않은가?
”죽음“을 해석한 방법은 서로가 다르지만, 그것이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는 관점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같은 수준의 해석이다.
법륜스님과 일면식도 없는 관계지만 저명한 인플루언서와 내가 쓴 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 그지없다. 낚시로 잡은 고기와 소주 한 병 택배로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