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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an 16. 2021

단무지 인생

단무지에 얽힌 두 가지 사연


" 김밥 다섯 줄 포장해주세요. 아.. 두 줄은 단무지 빼고요 "

집에 오는 길에 김밥 좀 사 오라는 마나님의 명을 받고 동네 새로 생긴 김밥집을 들렀다. 이 집 김밥을 몇 번 먹어봤는데 맛있더란다. 그런데 김밥에서 핵심 재료라 할 수 있는 단무지를 빼 달라고 한 것이다. 김밥을 만드는 아주머니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어본다.

" 네? 단무지를 빼라고요? "

찐빵에 팥소를 빼 달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는 예상 밖의 요구에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릴 한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하고는 힐긋 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손님이 그렇게 해달라니 마지못해 단무지를 빼고 김밥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이렇게 김밥엔 최고의 궁합이라 할 수 있는 단무지를 굳이 빼 달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집 아이들은 한결같이 단무지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집사람조차 썩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가족들과 중화요릿집을 가거나 분식점을 가면 밑반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메뉴가 단무지다. 하지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단무지는 모두 내 몫이 돼버린다. 이 맛있는 걸 남기는 건 단무지에 대한 모욕이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낭비이자 사치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나는 하나도 남김없이 싹 먹어치운다.

단무지는 국어사전에서 일본식 짠지라고 설명한 걸 보니 일본에서 시작된 음식인 거 같다. 그 유래야 어찌 됐든 한국인 입맛에 맞게 토착화된 음식인 단무지에 내가 이토록 연연하는 데는 잊지 못할 두 가지 사연이 있어서다.

30년 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하자마자 3살 어린 과후배와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허리디스크가 심해 군면제를 받은 신의 아들로 불린 후배는 유망한 영농 후계자였다. 나와 후배는 학비 마련을 위해 틈나는 대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늘 생활비 걱정에 근근이 하루하루 연명하며 힘겹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다행히 후배 집에서 쌀을 보내주었기에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쉬어 터진 김치에 계란후라이가 전부인 식사는 마지못해 먹는 허기 채우기에 급급했던 식단이었다.

그러던 추운 겨울 어느 날..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꼬르륵 아우성치는 허기진 배를 진정시키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밥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 생일 축하해~ 아침에 챙겨 줬어야 했는데 형이 일찍 나가는 바람에 못 챙겼어. 늦었지만 생일 정말 축하해요 "



늘 그랬듯이 특별할 것도 없는 초라한 밥상에 평소와 다른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단무지 무침. 노란 단무지에 고춧가루를 뿌려 제법 모양을 냈지만 뭐 그리 대단한 요리었겠는가! 하지만 나를 생각해서 만든 것이기에 내겐 천해진미 못지않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단무지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때 먹은 단무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뇌 속에 각인된 맛이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맛을 그리워 하기에 우리 집 냉장고에는 노란 단무지가 떨어지는 일이 없다. 이것이 내가 단무지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다.

그 후 학업을 마치고 나는 첫 직장을 들어갔다. 나보다 몇 년 빨리 입사를 한 선임은 성격이 화끈하고 매사에 상사로부터 일 잘한다는 칭찬을 듣던 인재였다. 하늘 같은 선임이 한 번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무지가 돼야 한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그 단무지의 의미는 순하고 식하고 속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 은어(隱語)였다. 그 선임은 나의 사회생활의 롤모델이었기에 나는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내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참 단무지같이 살았던 거 같다. 지금도 복잡한 걸 싫어하지만 무던히도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람을 쉽게 믿는 나머지 이용을 당해 낭패를 겪은 일도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런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단순함이 몸에 배어서인지 여전히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나는 싫어한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식하게 도전하고 또 도전했던 거 같다. 나 스스로가 만족이 될 때까지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감행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고 무식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진 않는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이 나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지속적인 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끈기 하나는 알아줬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2년간 개근을 한 것도 그러하지만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면 나의 치명적인 과실로 쫓겨나는 일이 없다면 나는 내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최선을 다했던 거 같다. 영원한 것이 없고 뭐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일 테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포기할 줄 몰랐다. 단무지라는 단어에 이런 심오한 의미를 부여해 살아왔기에 내가 단무지를 좋아하고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단무지는 나와 닮았다. 아니 내가 단무지를 닮았다고 해야 맞을 거 같다. 맛도 맛이지만 아련한 추억과 삶에 태도의 의미를 부여한 단무지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나는 앞으로도 김밥에 단무지를 빼고 먹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또한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단무지 정신으로 헤쳐나갔던 경험을 토대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는 이때에, 나는 순하고 식하고 속적인 자세로 씩씩하게 이겨 나갈 것이다. (2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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