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수험생들에게.
요즘엔 거의 안 꾸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잊어버릴 만하면 꾸던 꿈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꿈
나는 5단지 아파트 경비실 앞에 서 있다. 영어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다. 사실, 정확히 내가 뭘 기다리고 있는건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영어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것 같고 그것을 타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계속 든다. 버스가 오나 안 오나, 주위를 계속 살핀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건가 싶다. 오늘 봐야하는 영어 단어 시험이 생각나고 선생님이 내주실 학원 숙제가 떠오른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버거워진다. 학원에 전화를 하는 것도, 집에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계속 주위를 살핀다.
두 번째 꿈
오늘은 수능 당일이다. 지금은 휴식시간인데 다음 시험 과목이 수리인걸로 봐선 전 시간에 국어 영역을 봤나보다. 국어 시험을 봤다는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장 다음 시험 시간 영역이 수학이라는게 중요하다. 근데 이것 참 큰일이다. 내가 오늘 무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는 데 수리 영역을 끝까지 공부하지 못했다. 3년동안 대체 난 뭘 한건가. 개념 하나 끝까지 못보고. 지금 시험 보면 망할 것 같다. 이번엔 극도로 불안하다.
첫 번째 꿈은 내가 중학생 때 외고입시 준비학원을 다니던 상황이다. 저 꿈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그저 꿈에만 불과한건지 구분이 안 될만큼 실제같기도하고 그렇지 않기도하다. 중학교 때 있었던(실제로 학원버스를 타고 다녔으니 있었을 것이다.) 일이 20살 넘어서도 계속 꿈에 나오는 걸 보면 나에게 학원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히 말하면 외고 입시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안겨준 것은 분명하다. 외고 시험을 보던 날이 수능 보던 날보다 더 떨렸을 정도니까. 알게 모르게 꼭 ‘성공(외고 입학)’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던 것 같다.
두 번째 꿈은 현재 고3 수험생들이 카운트다운하며 기다렸을 대망의 수능 날에 벌어진 일이다. 그 중에서도 2교시 수리영역 시간. 엄청난 노력끝에 고3 3월 모의고사 이후로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어찌되었든 고등학교 내내 나를 일희일비하게 만들었던 수학이었다. 어떤 때는 휴식시간에만 불안함을 느끼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수리 영역 시험을 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시험 범위까지 다 공부하지 못해 문제에 손도 못 대겠고 이게 영어인건지 뭔지 모르겠는 상황이 오면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내 심장도 미친 듯이 뛰는 것 같았다.
나만 이런 악몽들을 꾸는 건 아닐 것이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 어떤 국어 선생님은 자기는 아직도 (당시 30대 중반이셨다.) 가끔씩 수능 시험 날 수리영역 보는 꿈을 꾸는데 꿈에서 깨고 나면 녹초가 되어있다고 하셨다.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다며. 시험을 앞두고 정서적 압박에 시달려본 경험이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가슴 졸이고 불안해하다가 눈물이 날 것 같은 상황까지 이르게 되면 정말이지 괴로워서 미칠 것 같다. 가끔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걸 꿈꾸면서도 인지할 때가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지옥같은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다 꾸고 만다.
참 감사하게도 수능 보기 전날 밤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건 아니었지만 불안함 때문에 중간에 깨거나 하진 않았다. 나중에 보니 나는 아주 ‘잘 잔’ 편이었고 그 날 제대로 못 자거나 한 숨도 못자고 왔다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별 것인 ‘대학’을 두고 내일 한바탕하고 올 수험생들이 지고 있을 마음의 무게가 오늘 바깥 공기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힘내요.’ 라는 말은 이미 주위로부터 너무 많이 들었을 것 같아 힘 나기는 커녕 되려 힘 빠질 것 같아 별로다. ‘대박나세요.’ 이건 더 별로고.
그냥 ‘잘자요’ 가 좋을 것 같다. 아무 꿈도 꾸지 말고. 깨지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