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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리스트 May 15. 2018

풍성한 삶에 대한 질문

풍성한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5. 하나님의 목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이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5.1 저는 이 질문에서 생각이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살지 못한다’는 전제가 오히려 잘못됐다고 생각이 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풍성히 누리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히려 사회적인 문제에 가깝다고 봅니다. 한국이라는 불안정한 사회가 만들어낸 고통 속에서 붙잡을 것 없는 사람들의 비참함이 느껴집니다.       

5.2 저는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회적인 것에 있다고 봅니다. 가장 문제는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못하는 곳이 우리 사회입니다. 우리는 노력해서 잘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목표를 세우고, 여기에 대해서 성취하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혹은 그것마저 안 되면 순간의 쾌락이나 향락에 취해서 살게 됩니다.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가진 불안정성입니다. 노력을 하거나 열심히 살아서 잘 풀릴 수 있는 구조라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정과 싸워야 합니다. 불안정성과 싸우기 위해서는 목표를 성취하거나, 막막함 속에서 쾌락이나 향락을 즐기는 것뿐입니다.       

5.3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제가 생각하는 풍성한 삶은 ‘예측가능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없는 사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신’은 오히려 ‘종교가 없는’으로 해석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간에 북유럽 국가들을 취재한 책입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입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삶이 행복하고 풍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수적 개신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답하는 비율이 5% 안팎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앞서 말한 ‘풍성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고작 5%뿐이지만, 종교성이 높은 미국이나 영국에 비교해서 훨씬 더 높은 행복도와 사후세계에 대한 만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유럽국가들처럼 사회적인 안전망이 발달한 사회는 종교가 없이도, 자신들이 ‘행복함’을 누리고 산다고 답을 합니다. 쾌락에 빠지거나, 그런 행복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이웃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5.5 기독교인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불안정성의 책임은 사실 그동안 교계 지도자들과 목사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 풍성한 삶을 예수님만으로 풍성하지 못했던 교계 지도자들과 목사들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램프의 요정’으로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조금만 힘들면 교회를 떠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이 자신들의 기도를 이루어주는 존재정도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양심적인 교계지도자가 있으면 그곳으로 몰리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교회에서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한 것이 ‘신앙으로 바로서지 못한’ 본인들의 책임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만든 것은 목표나 쾌락 없이는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사회, 그리고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지 못한 교회 탓이 큽니다.       

5.6 이 문제를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은 구원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풍성함 삶’에 대한 간증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가 같습니다. 비기독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간에 자신들이 힘들었거나, 혹은 방황했거나, 신앙의 방향을 못잡았다가 하나님을 만나 예수님만으로 풍성하다는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든 요인이 우리사회,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 목사들에게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6. 당신은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인 ‘가나안 성도’입니다. 제가 실제 교회를 안다니기 시작한 것은 재작년부터였습니다. 20대 때부터 시작된 신앙의 고민의 끝은 교회에 다니면 신앙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결론입니다. 신앙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답을 얻고, 얻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내게 맡겨주신 소명을 운명처럼 받아드리고 사는 것이 제 답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문제라면,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풍성한 삶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멀어지는 동안 예수님과 훨씬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긴 시간동안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신앙인들과 나누는 시간이 없어졌기에 제 신앙은 오히려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 안보다는 밖에서 더 큰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영적 성숙을 경험해왔습니다. 교회 밖에서 배운 신앙, 그리고 관점들은 교회에서 적용하고자 했었던 수년 간의 노력은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아무리 평신도가 노력해도 목사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교회 밖 성도가 오히려 교회 ‘안’보다도 더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와 생각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더 많이 사람들과 대화하고 기도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가 교만할 것이라고, 지식으로 신앙을 가둔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늘 반론이 있습니다. 제 20대 신앙은 그저 복음 앞에 순수했을 뿐입니다. 저는 늘 교회에서 어떤 말도 교회를 따라갔고, 부당한 일과 잘못된 일을 수도 없이 참아왔습니다. 다만, 복음 앞에서 진리 앞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이야기만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편하게 지낼 때는 오히려 틀린말과 행동들을 눈감을 때 였습니다. 저는 최소한 교회에서 한 가지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 수많은 검증과 생각을 거치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오만함이 아니라, 그 한 마디를 위해서 엄청난 준비와 시간을 들여왔던 사람입니다. 많이 참고,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분쟁을 일으키기 싫어서 피해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그 분의 신앙을 따라 살 생각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저의 삶은 늘 풍성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그분은 예배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고, 영과 진리이십니다. 고린도를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으로 부르신 분이십니다. 퍽퍽한 세상 속에서 자신만을 통해 풍성함을 누리기 원하는 분이십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어려운 시간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힘들었지만, 지금도 힘들지만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려워도 베풀며 살았고, 성경 늘 가까이 해왔습니다. 주님이 주신 소명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거기에 맞는 제 일을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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