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시냐는 질문에 대해
1. 신명기 5장 26절과 요한복음 4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 신 5:26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1 신명기 5장은 십계명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을 나타난 구절입니다. 십계명 이후에 그들은 살아있지만, 다시 하나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경외심’에 대상이지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졌던 두려움은 불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두려움이었습니다. 맥락상 이 본문은 ‘두려운 하나님’이 되겠지요.
1.2 요한복음 본문에서는 ‘예배받기에 합당한’ 하나님 정도로 생각이 됩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영’이시고, ‘진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요한복음이 가지고 있는 주석학적 의미는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본문에서도 영과 진리이신 하나님이 왜 예배받기 합당하신지를 증거 하십니다.
1.3 두 개의 절을 구성해서 보면, 경외로우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죄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기독교 원죄론’과 연관이 되어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2.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만드셨습니까?, 그렇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2.1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구절입니다. 개역개정 이전에 성경에 “우리의 형상대로”라는 표현을 놓고서 최근 유행하는 사이비인 하나님의 교회 세계선교회는 이것이 장길자, 안상홍을 지칭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복수는 개신교 주류 해석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뜻한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 그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2.2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라고 말합니다. 앞에 말했던 요한복음의 본문은 창세기 1장 27절을 전승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몸은 완전한 건강 상태로 지음 받았고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상’(히브리어로 ‘첼렘’이라고 표현합니다)은 ‘그림자’ 또는 은유적으로는 ‘헛된 것’이라는 뜻도 함께 존재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아주 고상한 존재임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그 맛을 잃으면 그림자와 같은 존재요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2.3 한 가지 문제는 창세기에는 인간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두 번이 나옵니다. 1장과 2장으로 나눠져서 나오는 것이지요. 1장에서는 ‘엘로힘 하나님(히브리어)’이,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합니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1장은 ‘하나님’ 2장은 ‘여호와’라고 칭합니다. 2장에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이라 나옵니다. 2장에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2.4 이는 성경이 오랜 전승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다른 것보다, 창세기 1장 27절 해설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증명할 존재가 인간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지구상에 인간뿐입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이 동물과 구분된 특징이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것은 본인의 존재를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장 9절)3.1 바울은 본 서신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를 밝히는 구절과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여 그들을 거룩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교제'(코이노니안)란 연합과 교통을 포함하고, 함께 참여하는 말입니다.
3.2 고린도전서 1장 전반적인 말씀을 통틀어 보아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린도’라는 말을 지금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치스러운 게으른 난봉꾼의 뜻이 있습니다. 고린도인처럼 행하다 하면 매춘행위를 하다라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과 음란,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 교회의 질서 등의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에베소에서 3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듣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3.3 1장의 ‘부르심’이라는 맥락, 그리고 이것이 쓰인 고린도교회라는 특성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목적은 비교적 간단히 답이 나옵니다. 1장 9절에서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고 봅니다.
4.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풍성한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4.1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풍성히 얻게 하려’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앞 구절인 9절에서 말하는 ‘구원’과 같은 것입니다. 이 장에서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2 여기서 요구하는 답은 풍성함 삶이란 여시서는 ‘예수님만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풍성함 역시도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나누고, 서로 돕고, 서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그런 삶이겠지요. 풍성함은 나의 부족함 속에서도 서로 아끼고, 사랑해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풍성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 요소들이 없는 사회가 풍성함입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서 만족할 수 있는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없다’는 반론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실 풍성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