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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Sep 21. 2020

[에세이 119] 도토리 꺼내 먹기

[여니의 크루 에세이] 나의 솔직한 감정이 나오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생각, 감정을 붙잡아 기록으로 남기길 좋아하는 나는 겨울에 먹을 도토리를 저장해두는 다람쥐마냥 이곳저곳 나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저장해둔다. 블로그, 다이어리, 아이폰 메모장, 노션, 그리고 앨범 등. 그렇게 차곡차곡 기록을 쌓고 살아가다 보면 계절에 상관없이 마음에 겨울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도통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거나, 이 또한 지나갈 거라 믿으며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을 때. 그때가 바로 도토리를 꺼내 먹기 가장 좋은 때다.


오랜 기간 동안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는다는 건, 내게서 변하지 않는 지점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행위다. 나는 불완전한 기억 속을 헤매기보단 기록을 믿는 편이다. 글을 쓸 때만큼은 나에게 가장 솔직하자는 주의 기도 하고, 기억 속의 나와 기록 속의 내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길 잘했단 생각을 한다. 새삼스레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하며 내 속도를 믿고 나를 다잡게 하는 힘이 기록 속에 있다.


올해 여름의 문턱에서 이별 후 스스로를 탓하며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다. 절대 믿지 않겠다던 아홉수를 이렇게 실감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피부에 느껴지는 계절은 분명 여름인데, 마음엔 또 겨울이 들었다. 다시 한번 도토리를 꺼내 먹을 시간. 최근 어떤 계기로 이전에 쓴 글들을 찾아보다 2년 전,  <라라랜드>를 재관람하고 썼던 글에 그 어떤 글보다 큰 위로를 받았다. 꼭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마지막 장면은 처음 봤을 땐 세바스찬의 상상이라 생각했다.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미아를 마주하며 우리가 처음부터 완벽했다면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였을까, 라는 부질없는 후회라고. 오늘은 감독이 관중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서로 오해가 있었던 포인트들이 사라지고 happily ever after,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완벽한 동화는 아니지만 둘이 이야기했던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어떤 이유로 둘이 함께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네 삶은 동화처럼 완벽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각자의 길 위에서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건 함께였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각자의 모습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좋고 슬픈 결말이다.

- 2018년의 3월의 일기 중



가만 보면 삶의 국면은 항상 새로운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두려워하는 지점이나 성장하게 되는 지점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그 누구도 아닌 과거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이겨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강력한 방패이자 무기가 된다. 나는 또 한 번 그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거의 발가벗는 느낌으로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을 때의 부끄러움은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기도 하고, 그런 글은 훗날 봤을 때 스스로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오히려 삭제해버리고 싶지! 서툰 글일지언정 진심이 담겨있다면 언제고 들여다봐도 그때의 마음이 선명하게 떠올라 좋다. 그렇게 힘들어했던 때도 결국 다 지나갔음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문득 나의 소중한 기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게 아쉬워 최근엔 작은 도전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20대의 기록들을 모아 독립 출판하기. 원래 나만 들여다볼 소장용 책 한 권을 만들고자 시작한 일이었으나 사람의 욕심이란 참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세상에 내놓는다고 생각하니 참, 나에게만큼은 큰 힘이 되어주던 글들이 볼품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목표 하나는 끝까지 가져가 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한 책을 쓰기. 정말 설령 아무도 내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한테 만큼은 좋은 책으로 남는다면 자랑스러운 실패가 될 테다. (그래도 한 명은 봐주겠지 뭐!)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진득하게 마음에 붙어 있는 글을 쓰자. Just keep writing!




다음 크루 정인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언제 가장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나요?"






• 때로 밀려오는 감정을 어떻게 마주하나요?

[에세이 118] 카타 토 아우토(kata. to. auVto)


• 기분이 편안해지는 나만의 장소를 한 주 동안 찾아볼까요?

[에세이 117] 현재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


• 휴식을 위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에세이 116] 휴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그림 그리기


• 무엇을 할 때 가장 잘 쉬었다고 느끼나요?

[에세이 115] 밥 짓는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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