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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May 11. 2018

[에세이 07] 내 꿈은 UN 사무총장

[하비에르의 크루 에세이 01]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초의 UN 사무총장”

 대한민국이 이 소식으로 떠들썩해졌을 때 UN사무총장을 장래희망으로 가졌다. 아주 어렸던 나는 그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각국의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내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구체적인 답안이었다.


꿈을 자유롭게 꿀 수 있던 나이는 과연 몇 살까지 였을까?

 돌이켜 보면 나는 중학교 때까지는 그랬던 거 같다.  

 정말 운이 좋게도 중학교 때,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지역에 있는 학교와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참여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성적순으로 추천을 받아서 참여했던 친구들과 달리 1순위로 선생님들의 추천을 받아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주변에 꾸준히 UN사무총장이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홍보해왔기 때문이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한국 학생 10명, 인도네시아 학생 10명으로 소수로 진행되었다. 1:1로 각자의 파트너가 정해지고 그 나라에서 지내는 24시간을 함께했다. 하루는 김밥을 함께 만들어 먹으면 다른 날은 나시고랭을 함께 만들어 먹고, 서로에게 어울리는 한복도 골라주며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생애 처음으로 첫눈을 경험한 날에는 하루 종일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그 친구들이 한국을 떠날 때는 가족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두 달의 간격을 두고서 이번에는 우리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한국 중학교와의 교류가 파격적인 행사였는지 처음 도착했을 때의 대우부터 달랐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를 주변으로 공항에서 식당까지 경찰차들이 경호를 해줬고 현지에 있는 여러 중학교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고 그곳을 떠나오는 날에는 수라바야 시청에서 시장님과 프로그램을 함께 한 학교의 전교생 앞에서 이 프로그램의 소감을 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전까지는 막연히 UN사무총장이 되겠다고 말을 하고 다녔던 나였다. 하지만 그곳의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나중에 더 멋진 모습으로 꼭 다시 만나야겠다는 마음이 갈수록 커졌던 나는 그 꿈에 대해서 진지해졌고 소감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던 자리에서 꼭 외교관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8년 후에 나는 그곳에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친구들은 이미 나를 Mr. diplomat으로 부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외교관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고 더 이상 그건 나의 꿈이 아니었다. 아니 내 꿈이 될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질책 섞인 질문이 있었다. ‘왜 스스로를 작은 틀 안에 가두게 되었을까?’였다.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던 그 친구들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멋있게 성장했고 그릇의 크기가 달라져 있었다. 그저 같이 웃고 떠들고 지냈던 때와는 다르게 아시아의 모든 국가에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쌀을 공급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친구는 농산물 유통 기업에 들어가 정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건축 디자이너인 어머니와 함께 작업해서 본인의 드림하우스를 짓겠다는 친구는 건축공학을 공부했고 실제로 드림하우스를 완공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의사가 되었는데, 눈과 관련된 신경학에 관심이 많아져서 자국의 라식, 라섹 수슬의 일인자가 되고 외국 학회에 초빙받는 것을 목표로 하던 친구는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가 실제로 함께 지은 드림하우스다.

 반면에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어땠을까? 나는 커갈수록 현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과 타협해갔다. UN사무총장이 될 거란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뱉을 만큼 더 이상 어리지 않았고 진지하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사라졌다. 심지어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 칸에는 진짜 내 꿈이 아닌 대학교 입시를 위해 만들어진 꿈이 적혔다.  


 그 8년 동안 내가 그린 나의 미래에는 오직 대학교 입학과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이 또한 실현하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멋진 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만 존재하는 미래를 꿈꿨던 나는 행복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다시 다녀온 이후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일절의 제한을 두지 않고서 생각해봤다. 현재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도 좋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내 가능성을 제한하는, 스스로 씌워둔 틀을 깨기 위해서 절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목표로 세워서 하나하나 해보기로 했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다음 에세이에서 풀어나갈 계획이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목표로 정하기 전에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차 도무지 보이지 않고 막막했지만, ‘이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아주 희미한 방향이나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고 싶은 청년에게 행복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수 있는 든든한 비저너리 크루들이 생긴 것만 봐도 꿈을 품는 것에 대한 위력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내게 그랬듯이 주변의 좋은 영향력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실감했다. 그리고 현재에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지만, 희미한 방향이나마 내가 목표로 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도네시아에 가게 됐던 것도 UN사무총장으로 향하는 희미한 방향 같은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는 더더욱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희미하더라도 그 길을 우직하게 끝까지 걸어가 보려고 한다.

  당신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스스로 본인의 꿈을 작은 틀 안에 가둘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우리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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