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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Sep 17. 2018

[에세이25] 겁 많은 거북이에게

[여니의 크루에세이 03]



01.

2018년 들어 가장 바닥을 치고 있다. 

나의 길일 거라 철석같이 믿었던 UX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흔들리니 작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 

또다시 시작된 혼란이, 이번에는 부끄러웠다.

또? 이쯤 되면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취업하지 않으면 나는 앞으로 취업하기 정말 힘들어지지 않을까? 왜 또 해보기도 전에 고민이야? 작년 이후로 나 자신을 비난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수십 번은 내 뺨을 치고 싶었다. 



02.
나는 뭐든 많이 느린 거북이다. 배우는 것도, 무언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그냥 거북이면 모르겠는데 겁도 많다. 졸업도 겨우, 인턴도 겨우,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며 방황하다 하고 싶은 일도 겨우 찾았는데 왜 또 망설이는 걸까. UX 디자인을 하겠다고 공부도 하고 프로젝트도 하며 나름의 포트폴리오를 쌓아 나가는 와중에 자꾸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았다. 애써 무시하고 무시하던 게 결국 터졌다. 정말 좋아했던 회사 한 군데 면접본 것 말고는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포트폴리오를 쌓은 쪽으로 어떻게든 일을 시작하고 봐야 하나, 나는 조금 다른 걸 찾아도 결국 또 이러려나, 다시 한 번 진로를 틀어야 하나 아주 세차게, 또다시, 갈등 중이다. 



03. 
이런 나를 꽁꽁 숨기고만 싶어 크루 에세이도 쓰기 싫었으나, 조금씩이라도 발전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으나, 또 후퇴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쯤 되면 이보 전진 이보 후퇴 같은데 허허.)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고, 내 뺨을 치는 대신 내가 먼저 그런 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싶어서다. 


나 말고 어딘가 존재할 겁 많은 거북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내가 도전적인 사람이나 빠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게 영감은 못되어도, 적어도 또 다른 겁 많은 거북이들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 또는 그를 넘어 '쟤가 하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같은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치스러운 나의 모습을 까발리기로 했다.  



04. 

에곤 쉴레의 La Libertad(자유). 내 안의 꼬여있는 실타래도 결국 밖으로 꺼내어낼 때 풀리지 않을까. 


겁이 많다고 해서 마냥 겁먹은 채로 가만히 있다면 오늘의 나는 이런 글도 쓰지 못했을 거다. 아마 현재의 나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모른 체하고 다른 소재로 크루 에세이를 썼겠지. 그러나 이렇게 겁 많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마음에 새기는 문구가 있다.


F-E-A-R has two meanings: 

'Forget Everything And Run' or 'Face Everything And Rise'. 

The Choice is yours.


겁이 난다고 다 잊고 도망칠 것인가, 겁이 나도 모든 걸 마주하고 올라갈 것인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크루 에세이로써 드러내고 마주하고 다시 올라가고자. 
그래서! 2018년도 어느덧 100일 정도 남은 지금, 다음 크루 에세이를 쓰러 돌아올 땐 무조건 한 발자국 떼고 돌아오겠다고 공개 선언을 한다. 


여전히 갈등 중이라 어떤 방향으로의 전진일지는 잘 모르겠으나, 열 걸음은 아니더라도 꼭 한 걸음 만큼은 떼고 오겠다고 말이다. 아마 그 한 걸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을 시작하는 게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러고 일 못 구하면 어떡하지, 벌써 걱정이 앞서지만 나를 드러내어 인정하고 공개적 약속을 하는 지금이 아마 겁 많은 거북이에게 가장 적절한 당근과 채찍일 것 같다. 

혹시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겁 많은 거북이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답답해하고 왜 그 정도밖에 못하냐고 다그칠지라도 나만은 열렬히 응원해주고 싶다. 느려도 괜찮을 수 있다는 걸 내가 보여줄 테니까 나는 글러 먹었다며, 안될 거라고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한 발자국씩 천천히 떼어 보자. 다음 이야기에는 자랑스럽게 내가 한 걸음을 떼게 된 과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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