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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저너리 Oct 22. 2018

[에세이 30] 나는 아직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아

[정인의 크루 에세이 02] 이런 내가 행복해도 될까_ 행복의 취향 찾기

# 행복


한글날,

비저너리 크루 클로이와 이른 오전의 혜화를 걸었다.

점심이라고 말하기에는 꽤나 이른 밥을 먹고 카페에 들어가 제일 강한 블랜드의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날 클로이와의 대화는 커피의 힘을 조금 빌려서, 내 마음을 조금 들뜨게 해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갓 볶은듯한 원두를 가게 밖에서 덖어내면서 거리 가득 커피 향을 풍기는 카페. 평소 같으면 잠들어있을 오전 시간에 낯선 장소에 앉아있으니 찾아오는 나른함과 몽롱한 기분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클로이, 우리는 다르지만 또 되게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클로이를 볼 때마다 클로이가 행복하면 좋겠어요"




서울 혁신파크의 벽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귀


이 대화의 발단은 이랬다.

얼마 전, 비저너리의 두 번째 워크숍에서 우리는 십년지기 친구에게도 꺼내놓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웠다. 비저너리의 방향성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같은 연애 이야기로 끝을 맺은 밤샘 대화의 묘미는 역시 홍자까님이 가져온 질문카드였다.  


'당신이 습관처럼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나요?'

'당신이 가장 당신답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난이도가 메겨져 있지만 아무도 그 척도를 예상할 수 없는, 부드럽지만 심오한 질문들이 대화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주제가 더해질수록 타임테이블은 사라지고 크루들의 솔직함이 하나둘씩 시간을 채웠다. 그리고 서너 시간은 거뜬히 채웠을 그날의 질문에서 나는 유독 클로이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


저는 이걸 못 고칠 것 같아요. 그냥 제가 평생 가져가야 할 숙제 같아요


무슨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각자의 우울감을 이야기하던 중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덤덤하게 꺼낸 클로이의 한 마디를 듣고 나는 무작정 클로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마 '저는 앞으로도 많이 행복하진 못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듯한 클로이의 표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의 뜬금없는 약속이 잡혔고 혜화의 카페에서 '엉망인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나절이 다 지나도록 대화를 나눴다.





드라마 [또 오혜영] 최고의 명대사  "나는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조금만 더 잘 되기를 바래요"



# 나


사실 요즘의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꿈을 찾아 발리로 떠나기로 결심한 뒤로 나는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친구의 긴 슬럼프를 함께 해 온 입장에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떠나는 그의 모습은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아프락시스 같았다.  친구에 대한 대견함과 진심 어린 응원을 담은 마지막 통화를 마치고 친구는 돌아오는 표 없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국에 혼자 남았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나의 진로 고민은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사회공헌에 뼈를 묻을 것 같던 2~3년 전의 나는 사라지고 이제는 이 분야에 대한 고민과 갈등. 그리고 몇몇 기업의 면접을 보며 새롭게 관심 가지게 된 분야들에 마음이 흔들렸다. 비저너리 크루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인생의 골'을 무엇으로 삼을지 잘 보이지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인생의 골은 너무 명확한데 어느 길로 가야 그 골에 갈 수 있을지 몰라서 어렵다고 했던 말이 다시금 기억났다. 그 식사 뒤에도 정착할 둥지를 찾지 못하는 새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아 부끄러웠고 지금 몸담은 직업적 세계에 대해 말하며 발갛게 볼이 상기되던 하리링과 미셸이 생각나 복받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버스를 여러 대 지나쳐 보냈다.


'나는 왜 나를 태워야만 행복할까?'

사회공헌을 처음 접했을 때, 매일 케이스 스터디며 교육, 막 학기 전공수업과 여러 개의 프로젝트, 프리랜서로의 경제활동까지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표현의 표본처럼 나는 바쁘고 또 바빴다. 잠은 학교 통학시간에 버스에서 잠깐, 밥은 사이사이 남는 시간에 커피나 간식으로 때우기 일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정말 행복했다.

사회공헌을 통해 보는 세계. CSR, CSV, 임팩트 비즈니스라는 단어와 사례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 삶에 희열을 더해줬다. 조금 과장하자면 매일 커피 다섯 잔씩을 때려 부은 사람처럼 나는 그 세계가 보여주는 비전에 중독되어 있었고 언젠간 그 큰 축의 하나가 되어서 그 세계를 굴려보고 싶어서 들떠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능한 선에서 접해본 세계는 의문 투성이었다. 프로젝트로 경험한 다수의 기업 사회공헌 활동은 나의 비전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고 이 세계가 익숙해지니 예전에는 들어가기만 하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리가 매력적이지 않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찾던 나라가 여기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부모님은 아직도 말씀하신다. "너는 뭐가 그렇게 까다롭냐"고 지금의 스텝에서 적당히 만족하고 그다음을 생각해야지 왜 항상 첫 술에 배부르려 하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나는 나를 끝까지 태워야 행복한데 적당히 맞춰서 어디든 가면 내가 나를 태울 수가 없을 것 같아 엄마"



일로 이뤄내는 나의 삶의 비전이 너무 커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올 때마다 나는 이렇게 흔들리나 보다. 

그 비전을 이뤄낼 것 같은 세계를 마주하면 심지만 남길 것처럼 타다가도 더 이상 태워지지 않으면 나라 잃은 사람처럼 공허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너무 좋아 보이는 나라가 있어서 그 나라에 가서 여행도 하고 싶고 사람도 만나고 싶고 그 문화에 녹아들고 싶어서 2~3년간 꾸준히 그 나라 말을 배웠는데. 이제 준비가 다 됐다는 생각에 떠나려고 했더니 그 나라가 어딘지 모르겠는 상황. 프랑스어를 3년간 꾸준히 배웠더니 사실 내가 가고 싶었던 그 나라는 독일에 더 가깝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을 요즘 매일 견디고 있다.

그리고 이 성장통이 나를 다 잡아먹기 직전까지 아무에게도 나는 지금 나라 잃은 사람처럼 슬프다고 말하질 못했다.



 



이 구역의 피노키오는 나야 /출처 [1인용 기분]_윤파랑 작가님



#계절과 성장통_ 행복한 척은 자신이 있습니다만


날짜도 선명히 기억하는 9월 20일. 나는 처음으로 내가 행복한 척에 능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날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이병률 작가님과의 북 토크에 다녀왔다. 작은 독립서점에서 10명 내외의 신청자들과 함께 진행된 시간이어서인지 내밀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매일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타던 나는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사전 신청 질문이 아닌 즉석 질문으로 마무리된 북 토크가 끝나갈 즈음. 마지막으로 꼭 궁금한 것이 있냐는 진행자 분의 말씀에 고민하다 손을 들었다.


"작가님 작품 중 [전부]라는 작품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우리가 아프게 통과하고 있는 지금은 어디입니까'라는 부분에서 항상 잠깐 멈춰 다시 읽어요. 그런데 작가님 저는 매 계절을 통과할 때마다 성장통 같아요. 오늘도 많은 분들이 가을 감성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계절마다 성장통에 어쩔 줄 몰라서 나를 사랑하는 척만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그 아픈 지점들을 어떻게 통과하셨나요"



나의 질문이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직도 그 답변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저랑 같은 과 이신 것 같네요
저도 계절이 올 때마다 성장통 같이 흔들려요.
그런데 그냥 받아들여야죠


그 뒤로 나는 내가 괜찮은 척 지나 보낸 것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아닌 척 뒷방에 밀어놓은 순간들, 치열하지 못했던 고민들.

완벽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습관.

그리고 사실은 내 기준이 아니었던 행복의 척도와 기준에 맞춰 온 모습.


나는 "행복"이라는 분야에서 너무 뛰어난 매소드 연기를 하고 있어서 나조차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모르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클로이의 표정이, 실제로 행복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나를 마주하는 요즘이 어쩔 줄 모르고 마음을 붙잡았나 보다.




#우리, 행복의 취향 찾기



다시 한글날의 혜화역 카페로 돌아와 보자

비저너리를 통해, 그리고 내 주변을 채워주는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것은 행복만큼 취향을 타는 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취향의 섬세함은 우리를 불타오르게 만들다가도 나라 잃은 사람처럼 서러워지게 한다. 모르는 것이 약인가 싶다가도 모르는 게 병이 되는 아주 개인적인 취향.


클로이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나는 나를 너무 몰라서 우리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가 보다.


어디서든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는 가시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 행복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클로이. 그리고 매일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헤매는데 그 취향을 모른 척 맞춰와서 아직 그 지점을 찾지 못한 나. 우리는 정 반대에 서있지만 사실 원 위에 서 있어서 등을 맞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아직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행복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내가 티끌없이 행복하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또다시 내 안에 나를 모른 척하고 괜찮은 척하는 것 같아서. 나의 삶의 최대의 골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기에 지금 얼버무려서 "나 행복해"라고 말해버리면 안 될 것 같다. 남들에 비해 치열하게 찾아야 할지라도 이제 나는 나를 알아가면서 행복하고 싶으니까.



취향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으면 단단한 지팡이가 되지 않을까 / 출처_영화 [나의 산티아고]



그리고 진심으로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내가 조금 돌아가더라도, 나처럼 행복이 쉬운 게 아닌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조금 치열해지자고.

행복해질 힘이, 자신이 아직 없어도 괜찮으니까 지금 지치면 잠깐 쉬고 다시 치열하게 그 길을 찾아보자고.

그래서 결국은 꺼지지 않는 나만의 행복을 찾자고. 내 생각엔 그게 우리가 행복의 취향이라는 세르파에게 기대어 삶이라는 세찬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방법인 것 같다.










서른 번째이자 두 번째 크루 에세이를 쓰게 된 정인입니다.

2주간 행복에 대해 어느 때 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추상적인 단어에 기준을 메긴다는 것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참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크루들처럼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처럼  저는 저를 꾸준히 사랑하고 싶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요.


매일 무너지는 것 같은 기준이 사실 빙하처럼 오래오래 자란다고 믿으며 우리 모두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음 에세이를 쓸 즈음에는 제가 조금 더 확실한 마음으로 "저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선뜻 허락해준 소중한 크루 클로이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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