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이모 May 10. 2021

엄마의 도배붓

스케이트 선수, 피아니스트,  의대생, 미용사였던 엄마의 마지막 직업은

올해는 페북에 단톡방에 어버이날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철 모를 때 했던 일들로 마음 아파하셨을 부모님께 사죄하는 글,  어머니 모시고 외할머니 산소 가서 엄마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보는 심정,  직장 때문에 서울서 사는데 엄마 밥 먹고 싶어 금요일에 부산으로 퇴근한 후배의 먹방 사진,  손주 볼 나이가 다되어서도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게 맞는지 부모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선배...


근 20년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입원 3일 후 성탄절 새벽에 소천하신 엄마가 오늘 더 그리운 것은 단지 어버이날 또는 5월이 되어서 만은 아니다.  엄마의 단 하나뿐인 동생, 내겐 단 한 명의 이모가 얼마전에 노환으로 소천 하셔서다.  장영옥 (향년 92세) 이모님은 울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생전에 출판하신 기독교 관련 서적과 또 그 일본어 번역판, 그리고 엄마의 간단한 양력을 정리해 가지고 오셔서 후손들에게 엄마가 얼마나 훌륭한 인생을 사신 분인지 말씀해 주셨다.  


꼭 이모님의 증언이 아니라도 엄마에 대한 전설 몇 가지는 내가 눈으로 목격했으니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엄마에 대한 첫 번째 전설은 피아니스트!  사업이 기울어 형편이 안 좋을 때도 집에 피아노는 있었다.  7남매 다 먹이고 입히고 잠시 틈이 날 때 소녀의 기도 (The Maiden's Prayer in E Flat Major, Op, 4: T. Badarzewska)를 연주하시던 엄마의 뒷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16세쯤 되셨을 때 청진에서 피아노 대회에 나가 이 곡으로 큰 상을 받으셨다고도 들었다.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내가 언니들이 쓰던 하논이나 바이엘 악보를 똥깡똥깡 치면 특별히 좋아하셨다.  중 2 때  찬송가 4성부를 치며 교회 반주를 시작했을 때 천재라고 기뻐하셨다.


엄마의 둘째 전설은 스케이트 선수! 역시 엄마가 17세쯤 되셨을 때 학교 대표 스케이트 선수로 나가 지금의 시장상 같은 큰 상을 받았다.  엄마와 스케이트장을 함께 간 적은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 노란 장판이 깔린 방에서 스케이트를 신기고 몸에 중심 잡는 법을 몇 번 가르쳐주셨다.  정작 스케이트장을 같이 간 건 우리 큰 아들!  초등학교 입학하고 전 학생이 스케이트를 배우는데 당시 일하는 나를 대신해서 매주 외손자를 데리고 스케이트장에 가셨다.   집에 와서 외할머니 손을 잡고는 '오늘은 22번 넘어졌어요' 하던 아이의 목소리와 그 옆에서 웃고 계신 엄마의 얼굴이 아직 생생하다.  신도시로 이사 와서는 손자 손을 잡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근사하게 타셨다.


엄마의 세 번째 전설은 의대 입학!  이모 말씀에 의하면 여고시절 일제 치하에서도 일본 학생을 제치고 1등을 뺏기지 않았던 엄마는 의대생이 되었으나 해부학이 너무 힘들어 중간에 그만두시고 가정을 꾸리셨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엄마의 기록능력, 시간관리, 그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일단 잠을 자라는 말씀, 그리고 평소에도 9시쯤 주무시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중요한 일처리와 기도를 하셨던 모습,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대처하셨던 여러 가지 예들을 돌아보면 의사는 아니셨지만 그에 버금가는 지식을 갖고 계셨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엄마의 네 번째 전설은 미용사!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사람을 몇 두고 미용실 (당시 미장원) 운영도 하셨다고 들었다.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 가면 집 바로 옆의 미장원에서 일을 하시고 동네 부인들과 네트워킹도 하시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 익히신 기술로 두발 자유화가 시행된 80년대 초반, 친구들이 방학 때 놀러 오면 앞머리 파마를 말아놓고 떡볶이를 해주시곤 했다.  덕분에 나는 가끔 핵인싸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예술적이고 운동 잘하고 명석한 엄마가 도배붓을 잡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부터 엄마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무료교육의 기회가 있던 도배일을 배우셨다.  엄마가 1980년 2월 12일 받은 수료증에는 서울 특별 시립 부녀복지관 기술교육 도장과 수료로 되어있다.   몇 개월의 교육기간과 시다 (작업 보조원) 생활을 거쳐 10년 정도는 도배일을 하셨다.



 도배를 다녀오시면 오늘은 어떤 벽지였는지 어느 동네에 가셨는지 방 세 칸짜리 연립주택의 제일 작은 방을 혼자 하셨다고 또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좋았다든지 간간히 말씀해 주셨다.  피아노를 치시던 엄마가 그 손에 칼이며 자며 도배용구를 들고 스피드 스케이트를 신던 발에 비닐 덧신을 신고 거친 건설현장에서 목과 어깨에 담이 올 때까지 일하셨다. 그렇게 어렵게 번 그 돈으로 내입에 들어갈 밥과 내 책가방에 들어갈 공책을 사셨다고 생각하니 참 먹먹해진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늘 웃고 계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엄마가 쓰시던 도배붓을 보게 되었다.  무심결에 잡은 나무 손잡이가 보드랍다.  엄마가 자줏빛의 큰 고무 대야에 흰 풀을 잔뜩 개어서 내가 지금 잡고 있는 이 도배붓에 듬뿍 묻혀 예쁜 벽지 뒤쪽에 골고루 바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이거 한 장 붙이면 딸 간식, 이거 마저 붙이면 딸 새 신발 하시며 뜨거운 마음으로 몸이 축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성실히 일하셨겠지....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사랑은 희생이 아닌 뜨거운 기쁨이다.  결코 식지 않는.


난 이 뜨거움을 오래 간직하려고 엄마의 도배붓을 챙겼다.  이사를 십 수 번 다니는 동안도 이 도배붓은 서랍장 한구석을 지켜냈다.   생전에 엄마는 내게 한 가지를 반복해서, 어렸을때 부터 강조했다.  여자도 일이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다.  여섯 살 때 즈음 피아노가 치기 싫다고 했을 때 엄마 죽으면 밥벌이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뭐 먹고 살 거냐고 버럭 소리를 치셔서 너무 놀라고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죽긴 왜 죽어 울 엄마가.... 엄마의 기도 덕인지 난 중3 때부터 피아노로 용돈을 벌었다. 교회 반주도 하고 주로 결혼식 반주, 동네 아주머니 기초 피아노 강습 등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을 주신 분들은 내 기술이 필요해서라기 보단 내 상황을 배려 하여 그런 일감을 주셨나 싶기도 하다.


여자도 꼭 일이 있어야 한다.  엄마의 도배붓을 잡으면 일이, 밥벌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고귀한지 느끼게 된다.  몸은 힘드셨겠지만 정말 엄마는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경제적 힘을 주는 도배일을 즐겁게 하셨다.  사춘기 나이인 내가 혹 창피해할까 봐 가끔 걱정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한 번은 내가 다니는 학교 숙직실 도배일이 들어와서 갈지 말지 고민하시다 결국 일을 하게 된 날 혹 나와 마주칠까 봐 매우 노심초사하셨단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도 엄마가 기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짬짬이 놓지 않고 해 오셨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과 경험을 동시에 하며 수입까지 얻는다면 참 행복할 일이다. 차선으로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수입원을 삼고 자신의 진짜 열정은 취미나 은퇴 후의 활동으로 성취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엄마는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쓰셨다.  피곤이 몸을 누르는 저녁시간에는 일단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고 조용한 시간에 글을 쓰셨다. 엄마가 1983년에 완성하신 '아버지/주옥같은 시간들'은  돌아가신 지 7년 후인 2011년에 교보문고 전자책으로 출판되었다.  성경구절과 찬송가를 100개의 인생 이벤트, 즉 결혼, 임신, 탄생, 입학, 청소년기, 청년기, 이사, 개업 생로병사의 과정을 엄마의 경험과 기도에 비추어 상황별 성구와 찬송가를 '요약'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자비출판하셨다. 책 뒤에 보면 언니들의 이름과 엄마 동창생들의 이름이 후원자로 나온다. 모두 몇 부를 인쇄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도 한 권 남아 있는데 정말 힘들 때, 예을 들어 시험을 앞두고 불안할 때 '시험' 페이지에 제안된 성경구절을 찾아 읽고 찬송가를 찾아 불러 보면 정말 큰 힘이 되는 것을 경험했다.  


엄마의 도배붓.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겨준 엄마의 직업,  엄마의 돈벌이 수단이 되어준 귀하고 고마운 도구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엄마의 마지막 직업은 도배사가 아니다.  엄마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의 삶을 통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당시 일상과 분위기를 글로 남기셨고 먼저 인생을 살아간 선배로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 늘 성경말씀 묵상하며 기도와 찬송을 통해 인생의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고 인생에서 기쁜 일 있을 때 맘껏 즐거워하고 감사하라는 기원을 담은 성구 100선 "요약"이라는 작은 사전을 만드셨다.  그러니 엄마의 마지막 직업은 도배사가 아닌, 어쩌면 엄마 평생 단 하나의 직업은 바로 작가!


엄마의 이름앞에  '작가'를 붙여 불러본다. 엄마 손글씨가 남아 있는 원고지를 보면서 글을 쓰며 울기도 웃기도 하셨을 엄마가 참 자랑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나도 지니, 너도 지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