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자가 '진'인 내 이름을 외할머니는 '지니 야, 지니 야' 하며 불러 주셨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회사생활이 바쁜 20대 초반에도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지니 야', 큰아이가 말을 배우던 2000년도, 6월에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지니 야' 다정스럽게 불러 주셨다.
서울 올림픽을 필두로 주로 외국인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일을 하게 되면서 영어 이름이 필요했다. 이름을 말해주면 Hyo-Jin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지금이라면 몇 번 반복해서 '히아오-진'이라고 하더라도 내 이름을 알려 주었겠지만 그땐 그냥 편한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Jinny라고 부르라고 했고 내 영어 이름은 지니가 되었다. 그래도 꼭 할머니가 그렇게 부르시니 너도 그래도 돼. "My grandma calls me Jinny so you can call me Jinny, too"라고 설명해 내 영어 이름은 편의주의의 산물이 아닌 가족이 불러주는 애칭에서 시작되었다고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구직을 할 때 이력서 등 문서에도 영어 이름이 필요했다. 한국 이름의 영문표기 옆에 괄호를 치고 (Jinny)라고 썼다. 명함을 팔 때도 Hyo-Jin (Jinny) 이렇게 했다. 1991년 2월 1일 앞으로 내가 27년 몸담을 직장에 들어갈 때도 나는 내 이름의 발음을 어려워하는 동료들에게 'You can call me Jinny' 하였고 텔렉스 (telex), 팩스(fax) 세대를 거쳐 이메일 시대가 열리면서 내 서명은 Jinny가 되었다. 사무실에서는 언제나 지니로 불려서 누가 찾아와서 Hyo-Jin 있냐고 물으면 그런 사람 없다고 했던 경우도 몇 번 있었다.
1993년 첫 호주 출장.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시점 내 첫 상사 Molloy 씨가 내 영어 이름에 대해 가벼운 우려를 표했다. 당시 호주 원주민, 즉 애보리진 (Aborigine)들을 칭할 때 줄여서 지니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호주 유력 일간지 시드니 모닝 헤럴드 (Sydney Morning Herald) 기자 출신이었던 Molloy 씨는 Jinny라는 이름을 쓰면 필요 없는 오해가 혹 생길까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염려하고 있었다. 일련의 상부 회의를 거쳐 별 문제없을 거라고 했고 나는 할머니가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해서 영어 이름으로 쓴 지니라는 이름을 계속 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걸 다 신경 쓰셨나 싶기도 하고 시대가 그랬지 하게도 된다.
지니라는 이름이 참 주위에 많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Genie of the lamp, 스펠링이 J가 아닌 G로 시작된다. 아주 오래전 아마 1970년대 즈음 방영된 미국 드라마 램프의 요정 지니는 여성이었다. 샤랄라 한 핑크 반짝이 천으로 입을 가리고 요술을 쓸 때마다 팔짱을 끼고 눈을 찡긋했던 기억이 난다. 애니메이션을 거쳐 가이 리치 감독이 2019년 만든 뮤지컬 영화 알라딘에서 Genie (윌 스미스)는 온몸이 파란색인 제주 많고 힙한 남성 캐릭터다. 재스민 공주 (나오미 스콧)가 "I won't go speechless'를 부를 때 정말 울컥했고 지니의 수다스럽고 익살 스런 연기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KT의 인터넷 브랜드도 기가지니, Gigagenie로 표기한다. 지니뮤직 역시 Genie Music으로 표기한다. 지니는 그만큼 흔하고 또 한국어로 썼을 때는 Jinny나 Genie나 다 '지니'라서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램프의 요정이 연상된다. 나쁘지 않다.
지니란 이름의 개를 만난적도 있다 존경하는 사진작가님의 작업실겸 거주공간 그때는 포스터 디자인을 상의하러갔는데 마당이 예쁜 4층 건물앞에 기품있는 진돗개 한마리ㆍ 들어갈때 못여쭙고 나올때 짓길래 이름을 물어보니 지니 라고하신다 진돗개의 진 을따서 ᆢ 지니는 이리도 흔한 이름 이였던가설마 너도 Jinny?
그런데 실제로 영. 미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 중 스펠링을 Jinny로 쓰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지니로 불리는 외국인 여성은 대부분 Jinnie 또는 Gennie, Genie를 쓰는 것 같다. 한국에서 또는 한국계 이민자들 중 이름에 '진'이 들어간 경우 Jinny로 쓰는 경우는 가끔 보았다. 그런데 몇 년 전 나와 같은 스펠링의 Jinny를 쓰는 미국인을 만났다.
놀랍게도 무려 나의 고교 동창생! 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잡지 모델을 할 정도로 훤칠하고 능력 많은 벽안의 꽃 미남을 만나 평생 외교관 신분으로 살고 있다. 연락을 한참 못하고 지내다가 그녀가 호주에 발령받았을 때 관저에서 한번, 그리고 수년이 지나서 한국으로 발령받으면서 또 용산 내의 집에서 한번 이렇게 고교졸업 후 30여 년간 딱 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 SNS로 서로의 안부와 자녀들 이야기를 가끔 나누는 정도. 그러다가 드디어 지난주 일요일에 번개 미팅을 하게 되었다. 4월의 볕과 바람을 길고 여유롭게 즐기고 싶어 이번엔 집이 아닌 아직은 외부인의 출입이 쉽지 않은 용산 미군부대를 산책하기로 했다.
용산미군기지의 Main post와 South post를 잇는 고가. 걷는동안 차량도 인적도 보지 못했다. 두번째 사진은 드레곤 힐 랏지 (Dragon Hill Lodge)앞 폭포
어떤 용도로 썼던 공간일까? 묵직한 빗장의 KEEP OUT 표시가 현재의 용산기지 상태를 말하고 있는것 같다.
용산 미군 기지는 현존하는 미군 부대중 가장 오래되었고 현재 평택기지로 이전 중이다. 반환될 부지는 용산 공원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이 부지는 1595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후방 병참기지가 있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교전을 한 바 있고 이후 일본군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일본군을 진주시키다 1910년부터 해방 전까지 주조선 일본군 사령부가 위치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미군이 보병 제7사단을 주둔시켰고 1949년 철수했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1953년 8월 15일에 다시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과연 이곳은 유령의 도시 같기도 하고 영화 세트장 같기도 했다. 도심 한복판에 낮은 건물로만 구성된 용산 기지. 넓게 잘 정비된 도로에는 산책을 하는 두어 시간 동안 차량은 손으로 꼽을 정도. 용산의 뜻에서 이름을 따온 드래건 힐 랏지 (Dragon Hill Lodge)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설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통역 시작했을 때 8군 식당에 다녀오면 참 맛난 것도 많고 달고 상큼한 배꼽 오렌지 (Navel orange) 맛에 반했던 기억도 나고 영어를 배우려고 매주일 부대 안의 교회로 출석했던 지인 생각도 났다. 참 대단한 곳이었는데.... 이 많은 역사의 흔적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벚꽃길을 지나 Main post와 South post를 연결하는 고가도로에 오르니 눈높이가 달라져서 그런지 이태원도 낯설다.
벚꽃길 때문이었을까. 친구는 4월에 결혼했다며 나는 언제 했는지 물어보았다. 어, 나도 4월, 우리는 연도는 다르지만 4월 벚꽃이 예쁜 그 주에 며칠 간격으로 둘 다 용산에서 결혼식을 하였네. 친구는 결혼식을 했던 용산 사우스 포스트 교회 (Yongsan South Post Chapel)을 보여주었다. 미군부대 내 교회는 1987년에 첫 예배를, 2019년에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만 남아 재스민 공주가 호랑이를 앞세워 나올 것 같이 나무와 덩굴에 덮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의 결혼 리셉션이 있었던 창이 아름다운 연회장 건물로 갔다.
30년 전 이곳에서 내 친구는 결혼식을 올렸다. South Post chapel 가는 길.
내 친구 지니는 예쁜 4월의 신부가 다시 된듯 어디서 결혼 예배가 있었고 어디로 올라와서 리셉션을 어떻게 했는지 찬찬히 설명해 줬다. 나도 용산 가족 공원에서 있었던 내 결혼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금은 더 이상 이런 공원을 개인의 결혼식 용도로 빌려주지 않지만 그때는 회사 선배의 같은 장소 야외 결혼식이 좋아 보여 나도 그리 결정을 했던 것이다. 당시 야외 공간을 어떻게 꾸미고 우리 회사동료들이 축가를 불러주었고 그날 예식이 금요일 11시 30분이었는데 당시 영사님이 버스를 대절하여 급한 업무가 있는 직원만 빼고 나머지 직원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던 생각도 났다. 요즈음 같아서는 상상하기 어렵운 일이다.
한참을 걷고는 생수 한 병씩 들고 드래건 힐 랏지 앞마당 인공폭포를 바라보고 앉아 두 Jinny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지금은 Covid-19 때문에 해외여행이 힘들지만 한국은 1988년까지 해외여행은 자유롭지 않았고 정부가 인정하는 이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었다. 서울 올림픽 이후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후 모든 국민이 '관광'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면서 비행기 내에서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은 델타항공으로 인수되어 없어진 노스웨스트 (Northwest Airlines)에서 기내 통역관, 즉 In flight interpreter라는 직종으로 사람을 뽑았는데 내가 지원했을 때 내 친구 Jinny도 지원을 했던 것이다. 또 90년대 초반 통번역 일을 주는 헤드 헌팅 회사도 같았고 알게 모르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네. 우리 둘 다 In flight interpreter 최종 면접에서는 낙방을 한 것 포함!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니. 수다가 달다.
30년 동안 세 번째로 갖는 이번 만남을 이렇게 평온하게 잘 보내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갔다. 내 친구는 2개월 후면 3년의 임기가 끝나 본국으로 가야 해서 벌써 짐을 싸기 시작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자주 볼 거 같은데 친구는 이번에 가면 언제 또 한국에 오겠냐며 아침마다 남영동으로 해서 서울로 7017을 타고 남대문 시장에 종로까지 하루 3시간씩 달리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한 서울 달리기는 꼭 그녀가 운동 마니아라서 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을 해외 생활을 하신 친언니가 있는 나는, 추석 명절의 송편, 날씨가 추워질 때 손이 가는 어묵탕, 눈이 오면 더 맛날 것 같은 붕어빵 그리고 없는 게 없는 남대문 시장의 그리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래 많이 뛰고 많이 눈에 넣고 가라 친구.
그래도 오고 싶으면 슈웅 하고 오렴. 우린 이름도 똑 같은데, 우리 집에서 잠시 같이 묵은들 무슨 허물이 되겠니?
나도 지니, 너도 지니. 집으로 가는길. 백미러에 용산 미군 기지의 석양이 시작되었다. 친구가 벌써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