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웅장하다. 그간 음악회를 들었던 대부분의 음악당, 예배를 드렸던 대부분의 교회에 거대한 대나무 병풍처럼 서있던 은빛 파이프들이 오늘은 하나하나 눈에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휘자의 손에 따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고 합창 단원들이 노래를 하듯, 오늘은 이 파이프 하나하나가 내가 키보드를 누르면 웅장하고도 부드러운 소리로 화답해줄 살아있는 연주자처럼 느껴진다.
집 근처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 오르간 클래스를 시작한 지 꼭 13주 만이다. 2021년 2월 20일 개강, 5월 15일 마지막 강의 및 연주회. 강의 첫날 첼로를 연주하는 동기 수강생이 마지막 시간에는 채플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이 그때는 설마 가능할까 했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관객은 없지만 (그래서 참 다행히 었지만) 그래도 실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한다고 생각하니 며칠 잠이 오지 않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번 파이프 오르간 실물 연주에 내가 이렇게 설레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세계 최고의 공연장 중 한 곳에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아쉬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호주 출장 때 백스테이지 투어를 할 기회가 있었던 퀸즐랜드 음악당에서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파이프 오르간 의자에는 앉았으나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던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 것이 1993년, 약 30년 전이다. 스탑을 누르지 않았으니 아무리 키보드를 눌러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오르간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 조차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날 이후 기회가 된다면 꼭 오르간 조작법 (?)을 배우겠다고 생각하고 긴 세월이 지났다. 그래도 늦게 하는 것이 포기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토닥토닥. Sure, better late than never!
오전, 오후로 나누어 매주 토요일에 진행된 이번 오르간 클래스의 마지막 수업은 수강생 모두 학교 채플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 교수님이 단톡 방으로 보내주신 멋지고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사진만 보고도 과연 내가 이 거대한 악기를 만질 수 있을까? 걱정 반, 설렘 반. 그날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평소에 강의를 받던 지하 2층 레슨실에서 발 페달 연습을 조금 하고 시간에 맞추어 채플에 갔다. 정말 평소에는 눈에 안 들어오던 파이프 크기며 모양, 그리고 오르간 콘솔 (organ console)의 위치와 모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매뉴얼 (손 건반, manual)이 2단 일지 3단일지도 궁금했다. 레슨을 받았던 전자 오르간과 같은 2단이다. 그레이트 (great)와 스웰 (swell).
처음 연주해 본 대학교 채플의 파이프 오르간. 그레이트와 스웰 2단의 건반과 30건의 발 페달, 37개의 스탑이 있다.
오르간 콘솔 양 옆으로 파이프 오르간의 얼굴과 같은 페이스 파이프 (face pipe) 또는 디스플레이 파이프(display pipe)라고 불리는 대형 파이프가 왼쪽에 15개 오른쪽 15개 중앙에 3개 모두 33개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적어도 3, 4000개의 파이프가 있다고 들었다. 이 파이프의 숫자는 발 페달 30개 x 스탑수 + 매뉴얼 건반수 48 x 2 (그레이트와 스웰로 구성된 2단이므로) x 스탑수이다. 잠깐의 영접이어서 스탑의 위치와 건반의 연결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은 못했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발 페달 30건 x 오른쪽 스탑 15개 = 450개의 파이프. 매뉴얼 2단에 왼쪽 스탑 수를 곱하면 48 x 2 x 22 = 2,112 합하면 최소 2,562개의 크고 작은 파이프가 이 악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핸드벨이 자기 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직 그 음에서만 소리를 내듯 2,562개의 파이프가 오르간 콘솔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그 한음을 만들기 위해 저렇게 긴 시간 그 자리에 묵직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큰 파도를 본 듯 뜨거운 화산을 만난 듯 매머드 급의 압력이 내게로 오느것이 느껴졌다. 내 손가락의 약한 힘으로 누른 건반이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으로 소리가 난다니... 그것도 이렇게 크고 많은 숫자의 개별음과 색을 가진 파이프 소리로 음악을 만들다니... 실로 이 오르간에 속한 파이프들은 2,562명의 연주가, 성악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잠시 초면의 파이프들과 대화를 하고 이제 교수님의 지도로 한 명씩 준비한 곡을 연주할 시간. 춘천에서 교회 반주를 하시는 분과 안산에서 오시는 반주자님은 오르간으로 편곡된 찬송가 두곡씩을 멋지고 엄숙하게 연주해 주셨다. 첼로를 하시며 마지막 수업은 채플 파이프 오르간으로 하자고 제안하신 분과 나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단조에서 토카타 부분과 17세기에 작곡된 짧은 곡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진도를 앞서가신 미래의 오르간 박사님은 바흐의 판타지아와 푸가 G단조 (Bach-Fantasia and fugue in G minor BWV 542)중 판타지아 부분과 프랑스 작곡가 길망 (Guilmant)의 오르간 소나타 No 3 Op 56을 정말 멋지게 연주했다.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6월 개강 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채플의 파이프 오르간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개강 3주 차까지 양말을 신고 수업에 임하고 오르간 슈즈를 굳이 사야 하나 발레화로 대신해보려고 했던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활용해서 악보를 더 잘 파악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습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도 아쉬웠다. 그래도 이 나이에 새로운 걸 왜 배우나,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너무 나만의 유희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자괴감이 들 때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스스로 칭찬하고 싶다. 정말 백지 같은 상태의 고령(?)의 학생들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이끌어 주신 교수님의 소프트 리더십이 포기하지 않은 이유의 80 퍼센트, 서로를 격려하며 정보도 나누고 재미있게 함께 수업한 동기들이 나머지 20 퍼센트를 채워주었기에 가능했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퀸즐랜드 문화센터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래서 혹시 음악당의 파이프 오르간을 보게 된다면 좀 더 친숙하게 반가운 마음으로 여유롭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Mystery로 남을 뻔한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궁금증.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알아가는 것이 참 즐겁다. 모르는 악기에 대해 배워가는 것 이상으로 삶의 여정은 매우 상이했으나 비슷한 열정으로 평생교육원에 모인 파이프 오르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가는 것 또한 귀하다. 3주간의 방학이 지나고 다시 수강을 하게 된다면 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할 것이다. 너무 신기하게도 천천히라도 바흐를 연습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기회가 된다면 학기말에는 건반이 눌려지기를 기다리는 2,562명의 은빛 연주자를 만나러 갈 것이다. 부끄럽지 않도록 성실하게 연습할 일만 남았다.
에필로그
왕초보 아줌마의 파이프 오르간 실물 영접을 가능하게 해주신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평생교육원 오르간 클래스 선장님 이웅희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영상을 촬영해 주신 이성신 동기님, 오르간 배워볼만 하다고 용기 주신 감자꽃 스튜디오 이선철 대표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종이 그림 피아노에 손가락번호를 적어 계명을 가르쳐 주신 엄마께 참 고마웠다고 속삭여 드리고 싶습니다.
음악은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재능이 없었습니다 음악이라는 길고도 어려운길을 묵묵히 걸어 마침내 무대에 오르신 이땅의 모든 연주자님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반주로 봉사하시는 모든 반주자님께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