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도 손기정 문화 도서관. 집과 아주 가까워서 손문도에서 강의 해 주는 분들은 마치 내 집 거실에서 커피라도 함께한듯 친근하게 느껴진다. 11월 19일 개관행사 행사이후 특히 관심을 가지고 들었던 강의.
가을비가 예쁘게 내리는 11월의 마지막 날 오후 손문도 도라지 (손기정 도서관 도서관 라운지)에 열명남짖 도서관 이용자들이 모여 앉아있고 최인아 책방 대표는 조금은 딱딱한 모습으로 대형 스크린 앞에 앉아 간단한 인사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오늘은 꽤 바쁜 화요일. 내게 조금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우중에 뛰어와서라도 꼭 이분의 강의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내 주위에 30년 정도 한 직장에서 근무하시고 퇴직한 후 이렇게 멋지게 제3의 인생을 사는 여성분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한 후배의 초대로 책방의 북 콘서트에도 가보았고 우연히 그곳에 참석하여 Q&A때 열심히 질문도 하는 또 다른 후배를 보면서 이곳은 지성인들의 핫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고 이런 문화를 만든 주인공이 궁금했던 것.
생각보다 근엄한 얼굴의 최인아 대표는 우선 2020년 1월 강남 파이낸스 센터에 오픈한 제2 최인아 책방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건물주가 최인아 씨를 찾아와 책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건물의 가치 면이나 상권 형성에 도움이 되니, 파격적인 임대조건으로 (아마도 거의 무료?) 입점을 했으나 관리비가 무척 비싸다고 하셨다. 어쨌든 52세에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타임 테이블에 의해서 자발적인 퇴직을 하고 퇴직 이후에는 평생 학생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은퇴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책방 마님으로 강남에서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겨 지성, 문화, 예술, 소통, 힐링의 공간을 창조해나가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대표님은 조근조근 자세해 친절하게 그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들려주었다.
대한민국 최초 그리고 최고라는 수식어를 꽤 여럿 달고 최초 대기업 (제일기획) 여성 부사장으로 몸값이 아주 높을 때, 오히려 본인은 50세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너무 일만 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 회사에서 했던 일과 관계없는 퇴직 후 인생을 꿈꾸게 된다. 회사와 미리 이야기하고 아주 아름다운 Early retirement를 한때가 52세, 2012년 12월 7일이라고 했다. '화양연화'라고 표현한 은퇴식에서 100여 명의 후배들이 줄을 서서 장미꽃 한 송이씩을 건네고 꼭 안아주는 퍼포먼스를 해 주었고 한국 최강의 광고회사답게 제일기획은 누가 보아도 영화 같은 멋진 '최인아' 영상을 만들어 퇴직자를 감동시킨다. 그 일이 있고 몇 년 후에 발레리나 강수지 씨가 은퇴할 때도 후배들이 그런 비슷한 세리모니를 해 주었다고도 했다.
최인아 대표는 본래 기자가 되고 싶었다 했다. 뜻대로 되지 않아 당시 최고의 광고회사에 지원했고 당당히 합격. 29년간 최고의 카피 라이터, 대기업 최초 여성 부사장 등의 새로운 역사를 쓰며 승승장구하는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더 이상 자기 업무의 연장 같은 일에는 관련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서양사'를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에 등록하고, 29년간 해온 업무와 관계있는 일은 반드시,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는 원칙을 세우고 광고, 커뮤니케이션 쪽에는 오란 곳은 정말 많았으나 근처에도 안 가며 퇴직 후 2년여를 보낸다.
그런데 혼자 전혀 새로운 곳에 시간을 쓰며 인생 3막을 쓰고 싶었던 그녀는 퇴직 후 3년 즈음에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1. 혼자 vs 같이. 2. 쓰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퇴직 4년 차 바로 이 질문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최인아 대표의 특별함은 이 질문들과 얼마나 성실하고 심도 있게 씨름하였는가로부터 출발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2년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아주 새로운 분야에서 보내고 나니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 '나는 어떻게 일에 재미뿐 아니라 의미까지 부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What do I do?... 그리고 결론은 'Finding a creative solution by power of thinking' 생각의 힘으로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 그런 일을 혼자가 아닌 같이 하면서 그런 일에 쓰이고 싶다. 였다. 그리고는 사진을 하나 보여주셨다. 돌을 자르고 쪼는 일을 하는 석공이 큰 돌더미에서 일하는 장면인데 이 분에게 "지금 뭘 하고 계세요?"라고 질문을 하면 그 답은 3가지 레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지금 돌을 쪼는 일을 하고 있지요', 두 번째는 '지금 돌을 다듬어 돈을 벌고 있지요', 세 번째는 '지금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지요.' 이렇게 같은 일을 하더라도 세 가지 태도, 세 가지 레벨의 답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은 물리적 일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결과가 같겠는가.
이어 최 대표는 "질문"이 곧 해법이고 목표라고 했다. 해법의 수준은 곧 '질문'에 비례한다고. 그리고 Why와 What 중에 '왜, Why'에 집중하며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지속적인 씨름을 해갔다고 했다. 그리고 책은 워낙에 좋아하고, 글은 평생 써왔으니, 어쩐지 책 관련 일은 재미있을 것 같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창조적인 해결책, 솔루션으로서의 책의 기능에 주목하게 되었다. 추천서가의 방식을 채용하여 고민이 있고 해결책이 필요할 때 책이 하나의 솔루션으로 제안되고 그러한 제안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 곳으로 책방을 선택했다. 그리고 최인아 서점으로 하지 않고 책방으로 한 것은 책을 파는 점포가 아닌 책과 시간과 경험, 체험을 함께 할 수 있는 노래방, 사랑방처럼 책방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창의적 솔루션으로서의 책. 누가 어떻게 추천을 하는 것이 좋을까? 이 시점에서 29년 화려한 사회생활 경력과 네트워크의 힘이 발휘되었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느꼈다. 최 대표는 책방을 열기위한 준비작업을 치열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주변 지성인들에게 도움을 받은 부분이 크다. 바로 220명의 지인들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는데 두가지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한것. 우선 1) 인생의 책 10권을 추천 이유와 함께 적고 2) 12가지 주제 중 3개 이상을 고르고 각 주제별로 3권 이상의 책을, 역시 추천 이유와 함께 적어주세요. 즉 모두 19권을 추천하고 그 이유를 써야 하는 장대한 숙제를 지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던져준 것이다. 보통 사람이 어떤 일에 피드백이 필요해서 도움을 구한 다면,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회 지식인층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 이런 숙제를 받았을 때 정성껏 답을 해 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할 것 같은데, 220명 중에 160명 이상이 이 어려운 과제를 정성껏 완성하여 보내왔고 이 19권 x 160명 이 추천한 3000여 권의 책과 그 추천 이유 그리고 추천인들의 관심과 축복을 기초로 하여 책방이 탄생 된것이다. 퇴직 3년이 지내고 '같이, 쓰이고 싶다'고 생각한 한 때 한국 최고의 여성 카피라이터 이던 그녀의 생각 숲이 비로소 조성되기 시작 한것이다.
추천받은 도서와 추천이유를 정리하여 추천서가를 정리하였는데 주로 질문을 주제로 하여 분류 하였고 예를 들어, Q2. 서른 넘어 사춘기를 겪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Q4. 고민이 깊어지는 마흔 살 들에게 Q7 특히 생각하는 힘을 키원 주는 책, 등등 질문을 목표로 하여 솔루션이 될만한 책을 추천해 주는 책방으로 꾸민 것이다. 이런 친절한 책방, 누구든 가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나는 최인아 책방의 최강 무기는 장르, 세대, 인종(?!)과 주제를 가뿐하게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에 있다고 본다. 책의 저자뿐 아니라 '카피라이터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등 업계에 있어도 알쏭달쏭한 주제들을 전문가들이 직강 형식으로 해주는 다양한 토크 프로그램, 유럽 귀족들의 살롱 음악회가 이러했겠구나 싶은 소규모 연주들과 연주자 토크, 최근 세계 유수 자동차 디자이너가 직접 강의하고 스케치 시연을 보여준 행사까지 최인아 책방이 아니면 기획할 수 없는 고품격 문화 경험이야 말로 이곳을 다른 어떤 서점, 문화 공간과 차별화 시켜주는 매력이다. 최 대표는 실제로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시간과 공기를 만드는데 가장 귀한 경험이 되도록 무척 애를 쓰고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이제 최인아 Book Club은 800명 이상의 유료회원이 있고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책방이 추천하는 책과 책방 마님의 편지를 집에서 편안히 받아 본다고 한다. 회원에게만 주어지는 각종 행사 참여 기회와 할인 혜택도 물론 다양하다. 최 대표는 책의 1쇄를 책임질 수 있는 3000명의 회원을 만드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했다. 근엄하고 차가운 듯한 첫인상이 두 시간 정도의 토크를 듣고 나니 진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구나, 같은 얼굴인데 다르게 느껴졌다. 책방 마님으로 제3의 성공적인 인생을 사시는 것은 같은 퇴직인으로써 진정 부러운 일이지만 내가 최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은 부분은 따로 있다. 퇴직 후 인생의 전환기에서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 내가 앞으로 다시 '같이' 할 수 있을까? 내가 한번 더 '쓰이고 싶다'는 것은 욕심일까? 하는 문제들에 대해 밑바닥까지 내려가 고민하고 씨름한 그 솔직함이 그리고 본인 만의 고민에서 얻어낸 답을 믿고 사용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해 현실로 만들어 낸 그 실행력이야 말로 대기업 부사장, 문화공간, 책방 대표를 넘어 늘 고민하고 노력하고 실천하는 동시대 선배님으로써 참 좋아 보였다.
디지털, 비대면 시대다. 그래도 새해에는 최인아 책방에 불현듯 찾아가 봐야겠다.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워 사각사각 낯선 책의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 그립거나, 미세 먼지로 가슴이 답답해 '지적이고 우아하고 충만한 시간,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공기'가 호흡하고 싶을 때. 또는 책방마님이 퇴직 3년차에 치열하게 고민했던,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해', '나도 쓰이고 싶다'는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에필로그
강의를 듣고 3주간 품고 있다가 그때 적은 노트의 내용 대부분을 토하듯이 글로 옮겼다. 꽤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커피 한잔으로 아침 점심을 퉁치며 나름 정성드려 강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브런치 한꼭지를 완성하고 그 글을 읽으니 어쩐지 강의때 느꼈던 신비감이나 부러운 마음이 반감되었다. 그리고 질문이 생겼다.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쓰이고 싶어서'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책방마님의 두시간 강의를 듣고나니 책방을 유지하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바쁘고 힘든지, 물론 보람도 있겠으나,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를 생각하니 참 핑크빛으로만 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업무량이다. 그렇다면 지금 책방마님은과연 '같이 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같이 일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쓰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쓰고 있는 것인가?'
역시 재미에 의미까지 더한 제3의 인생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닌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