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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May 22. 2020

코로나 19 시대의 밥

"인자는 엄마 밥이 맛있다네?" 친정엄마의 말에 서운함이 반쯤 묻어있다. 그저께 친정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려가시고, 나는 집에 남아 화장실 곰팡이를 청소하고 묵은 옷을 정리했다. 퇴근한 신랑과 비빔면으로 배를 채우고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큰 애가 밥을 건성으로 먹더라고 말씀하셨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큰 애는 "할머니 밥이 제일 맛있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유치원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엄마 밥보다 할머니 밥이 맛있다고 노래를 불러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한편으로 그 말은 친정엄마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도 기분이 좋았다. 손녀가 맛있게 밥을 먹고, 칭찬 세례까지 해대니 친정엄마가 얼마나 행복하실까 느껴보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도 딸의 말 덕분에 엄마 밥을 더 자주 얻어먹게 되는 것 같아서 고맙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내가 한 밥이 더 맛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코로나가 바꾼 우리의 일상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많다만, 내게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요리 솜씨가 급격히 늘었다는 것이다. 성장 1기는 신혼시절이고, 성장 2기는 첫애가 이유식을 떼고 유아식을 시작하던 즈음 시작되었다. 성장 3기는 코로나 19 사태 기간 동안 진행됐다. 1기와 2기를 본다면 앞으로 적어도 10년 동안은 제자리걸음하고 있었을 요리 솜씨인데, 코로나 때문에 약 100일 만에 압축적으로 좋아졌다. 1기와 2기를 더한 것보다도 훨씬 빨리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했다. 음식 맛도 좋아졌고, 할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도 늘었다.




성장 1기

결혼 전에 혼자 살았던 경험은 외국에 있을 때뿐이어서 내 손으로 밥과 국, 반찬이 있는 한식 밥상을 차려 먹은 적이 없다. 늘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었다. 1기는 한식 상차림과 한식 그릇에 익숙해지는 시기였다. 밥을 안칠 때 적당한 물 양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워서 신랑에게 미루곤 했었다.


나는 향신채나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고 한 그릇 음식으로 먹는 걸 좋아한다. 신랑은 김치와 국물, 찌개 같은 간이 센 음식을 즐겨 먹어서 흰쌀밥이 꼭 있어야 한다. 강약 조절이 적절하게 맞춰진 여러 가짓수의 반찬과 국물이 있어야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신랑의 정시퇴근이 참으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이때에는 이것저것 쇼핑을 많이 했다. 요리책도 저자나 요리 유형별로 샀고, (신혼생활의 하이라이트인) 세계 음식을 해 먹는다고 각종 조미료와 소스를 샀다. 활용도는 딱 절반 정도였다. 신랑이 수시로 야근을 해서 밥상을 차릴 일이 거의 없었고, 어설픈 손끝에서 나온 음식들을 먹은 뒤에는 다시는 손대고 싶지 않은 재료나 요리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엄마에게서 밑반찬을 조달해서 밥을 차려먹었다.


성장 2기

큰 애의 이유식이 끝나고 유아식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부엌살림과 요리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장 2기가 시작되었다. 애를 보면서 세끼 유아식을 만들어 먹이고, 나랑 신랑도 먹어야 하니 전략적으로 밥을 차려야 했다. 요리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음식과 눈과 입에 익숙한 음식이 우선순위였다. 새로운 요리를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경우의 기회비용이 매우 컸다.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랐고 친정엄마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신랑도 좋아하는 한식 메뉴로 손이 가기 시작했다.


의외로 한식이 손이 많이 안 갔다. 6인분의 쌀을 씻어서 안쳐 놓으면 하루를 먹을 수 있고, 국을 한번 끓이면 두 끼는 해결할 수 있다. 나물과 밑반찬 역시 그런 식이다. 갈수록 매번 칼질하고 볶거나 데치고 삶아서 먹는 한 그릇 음식이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어쩌다 보니 효율적이기로는 한식이 으뜸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딸은 빵보다는 밥심으로 사는 아이였다. 신랑의 입맛을 쏙 빼닮았다. 김치 하나만 입에 맞아도 밥 한 그릇 뚝딱 먹는 아이다. 안전하게 한식을 추구하게 됐다.


아이가 밥 먹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 입맛은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그저 딸애가 잘 먹을 만한 반찬 위주로 밥상을 차리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간을 맞추고, 양념을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친정엄마의 된장국과 김치, 연근조림으로 상을 차렸고, 어느 날은 엄마의 물김치와 삼색나물, 불고기 반찬을 먹었다. 엄마의 반찬이 동이 난 날은 간장 참기름 밥 혹은 계란파 볶음밥과 계란국으로 해결했다. 그게 아니면 싱겁디 싱거운 콩나물국과 계란 프라이, 김 같은 것을 상에 올렸다. 그렇게 나는 내가 하든 엄마의 도움을 얻든, 매일 세끼를 쌀밥을 지어먹게 되었다. 신랑은 딸 덕분에 밥 얻어먹고 산다는 말이 나왔다.   


성장 3기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확산과 동시에 내게 특급 임무가 주어졌다. 임무는 '마트는 일주일에 단 한 번 갈 수 있다. 신랑은 매일 정시에 퇴근하고 외식은 불가하다'라는 최고 난이도의 어려움이었다. 게다가 '친정엄마의 도움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조건까지 붙었다.


코로나 이전엔 큰 애를 유치원에 보내 놓고 둘째랑 산책 가는 곳이 마트였다. 눈길 가는 대로 집어 들고 사 와서 내키는 대로 밥을 해 먹었는데, 이젠 식단을 세워서 일주일치 장을 봐와야 했다. 오로지 내 손으로 만든 음식으로만 삼시 세끼 밥상을 차려야 했다. 신랑이 매일 저녁밥을 같이 먹으니 매일 다른 고기반찬을 만들어야 했다. 불고기와 장조림, 닭볶음탕 같은 음식들을 요리할 줄 알게 됐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번갈아가며 구웠고, 구이 음식에 맞는 상차림도 구성할 줄 알게 됐다. 아침마다 불고기 양념이나 두루치기 양념을 만들어 고기를 재웠다.


매일 고기반찬이 떨어지지 않게 밥상을 차려댄 덕분에 내 레시피도 생겼다. 우리 식구가 한 끼에 먹는 고기 양도 파악했다. 삼겹살 400그람, 대패삼겹살 500그람, 카레 한 솥에 고기 100그람, 소고깃국 150그람, 불고기 400그람. 이게 우리 식구가 남김없이 먹는 양이다. 자투리 채소 처리방법과 반찬 로테이션 등도 손에 익어서, 애호박이나 양파, 감자 등도 음식쓰레기로 만들지 않고 다 먹는다.


돼지불고기로 상을 차렸을 땐 신랑이 "여보, 이제 이건 잘한다."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미역국을 먹으면서 "오늘 미역국 잘 끓였네, 마늘도 딱 적당하게 들어가고, 간도 맞다."와 같은 칭찬도 해줬다. 결혼 7년 만에 국 끓이고 처음 듣는 신랑의 칭찬이었다.   



다음 주부터 큰 아이는 유치원에 간다. 삼시 세끼의 압박이 조금 약해진다. 외식도 한 번씩 하고 아침과 점심을 가볍게 해결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다. 그런 한편으로 딸과 신랑이 내가 요리한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니 더 맛있게 밥상을 차리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그동안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했는데, 이젠 잘하고 싶다.


아무래도 곧 4기가 시작될 듯하다. 외적 강제로 인해 그동안 조금씩 요리 솜씨가 발전해왔다면, 곧 펼쳐질 4기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해주고 싶은 내 마음이 동기가 될 것이다. 딸들의 유년시절의 기억에 근사한 소울푸드를 입혀주고 싶다.




나는 한식 밥상을 차리면서 부모 됨을 느끼고 어른됨의 책임감을 가졌다. 더불어 부모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다. 쌀밥과 반찬, 국을 요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딸도 언젠가는 요리를 즐기고 같이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행복함을 느낄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딸의 딸로부터 "할머니 밥이 제일 맛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언젠가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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