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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주얼페이지 Feb 10. 2022

자본주의적 마감을 잘 지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마감들

나는 대체로 마감을 잘 지키는 편이다. 수강료를 내거나 금전적 이익이 생길 경우에만 서둘러 시작하거나 시간을 따로 빼놓아 마감을 지킨다. 이런 걸 ‘자본주의적 마감’ 준수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


지난달엔 한 벽돌책 챌린지에 3만 원을 내고 참여해서 <모비딕>을 읽었다. 몇 년 전에 사두고 본체만체하던 책이었는데 3만 원이 한 달만에 완독으로 이끈 것이다. 책을 사두고 읽지 않아서 생긴 손해는 무시할 수 있고, 참여비 3만 원은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책값에는 없고 참여비에는 있는 강제성의 힘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사실, 책을 살 때 그런 마음이었다. ‘당장에 읽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읽겠지.’ 무한한 시간을 생각하니 전혀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반면 3만 원의 효력은 한 달 뒤면 끝이었다. 하루하루 철저히 진도표에 맞춰 읽어내지 않으면 돈을 날린다는 생각에 해야 할 일이 뚜렷해졌다. 차이를 정리해보자면 챌린지 프로그램에는 시간이 유한했고, 마감이 있었다. 매일의 마감을 지켜 도전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더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자본주의적 마감의 유용함이다.

 


자본주의적 마감

한편 ‘자본주의적 마감’이라는 말을 만들면서 생각해봤다. 자본주의가 아니었다면, 자연의 순환적이고 연속적인 세계에서 애당초 마감이란 게 있기나 했을까? 만물을 상품화하고 혁신을 일상적으로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이니깐 마감의 등장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하면 되겠지, 언젠가는 되겠지,’ 이런 생각으론 경쟁을 이끌 수가 없다. 그 결과 마감은 당근과 채찍질이 되어 사람들에게 시간을 좇아 일하게 했다. 마감을 잘 지키는 사람에겐 근면성과 경쟁력의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도장 찍어주고, 못 지키는 사람에겐 ‘태만’ 낙인과 낙오 같은 위협으로 불안으로 떨게 만들었다.


<모비딕>을 다 읽었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 달 만에 도전하는 사람,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드디어 자본주의 세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나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는 걸까? 왜 혼자 하는 일과 공부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게 되는 걸까? 앞서 말한 것처럼 무한한 시간에 주목해본다. 자본주의 세상 아닌 세상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자본주의 이전의 세상은 사유 재산과 시계가 있기 전으로 수렵채집 사회다. 계절의 변화와 밤낮의 순환 속에서 식물이 자라고 동물이  크고 사람들은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모든 것이 이어져 있고 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의 뇌는 수렵채집 사회의 고대 인류가 가졌던 뇌에서 티끌도 변하지 않았다며,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각종 신체적, 심리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수렵채집인의 뇌를 갖고 있는 내가 ‘마감’이란 것에 자연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적마감

자연적 마감은 오로지 죽음, 소멸뿐이다. 그러니 자신과의 약속이란 것이, 미래를 꿈꾸며 계획한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자본주의 사회가 내게 시킨 것이다.


그러면 나 자신과의 약속이나 자본주의적 마감 모두 신기루 같은 것일까?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게 답인 것일까? 마음 같아서는 ‘그런 것 같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이니까. 마감을 지킨 후 느낀 보람과 즐거움, 성취감을 자본주의적 관점 아닌 개인적 관점으로 전환해보는 게 좋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적 마감’이 닥쳐왔을 때 ‘잘 컸다, 행복했다, 많이 나눴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생애 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자본주의적 마감에는 실패할지라도, 자연적 마감만큼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우리모두 멋진 마감을 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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