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를 불문하고 설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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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여행을 혼자 다녔다.
언제나 효율성을 최우선하는 것이 공과대학 6년동안 몸에 진하게도 베어버렸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란 필요하면 만들고 아니면 없애는 것이었다. 안맞으면 쿨하게 빠이, 세상엔 너보다 나랑 잘맞는 사람이 널렸어, 라는 오만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런 성향이 묻어나온 건지 나는 동행도 거의 구하지 않고 독고다이로 쏘다녔다. 동행을 구했던 것은 모든 여행을 통틀어 프라하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딱 한 번씩, 총 두 번이었다. 레스토랑에서 푸짐하게 시켜놓고 먹는 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호스텔의 대규모 도미토리에 묵을 때도 그 대상이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맥주를 한 잔 함께 하자던가 같이 야경을 보러가자던가 하는 제안은 모조리 거절했다. 너무나 쫄보인 나머지 내가 어떤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상대방이 어떤 존재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또한 계획에 없던 존재를 내 여행에 굳이 등장시키고 싶지 않다는 계산도 있었다.
아프기만 했던 여행의 기억
그러다 언젠가 친구 마리가 다른 친구들 몇몇과 하노이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여기저기 물어본 끝에 일정이 되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가는 것이었다. 일단 OK를 했지만 걱정이었다. 네 명이 우르르 다닌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선호도나 취향이 다 다를테고 그 중에 나를 포함 까다로운 인간형이 둘이나 있는데! 매번 홀로 여행을 다니던 나는 혹시 '내' 여행이 방해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기적인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떠난 하노이가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도로에는 음식물이 여기저기 버려져있고 위생이 염려되는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공기가 너무 안좋아 호안끼엠 근처에 내리자마자 숨이 턱 막혀 연신 기침을 해댔고 곧바로 마스크를 살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카페 안에서 담배연기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뭘 잘못 먹은건지 5일째 아침부터 엄청나게 오한이 왔다. 열이 나고 있었다. 온도계를 구해 재보니 38도 언저리까지 올랐고 간호학을 전공한 마리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약들로 간신히 버텼다.
"호오라.. 열이 아주 많이 나네? 흐음 그래.. 열이 나는 건 큰일이지 뇌가 녹아버릴수도 있다구"
당췌 걱정을 해주는 건지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생물체를 관찰하는 건지 알 수 없던 그녀의 반응을 뒤로하고 열심히 약을 먹어댔다. 나흘간을 지독하게 앓은 끝에 겨우 살아나보니 귀국날이었다.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대한민국을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이 솟구쳤다. 대한민국은 정말 좋은 나라였다. 다시는 베트남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가고 싶니?
여행을 돌아보면 우리는 같이 보낸 시간이 4일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여행지인데다가 병이 나서 생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군가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함께 유적지를 보러 다니고, 교외로 나가 덜덜거리는 곧 침몰할 것 같은 진동보트를 타고, 기념품을 같이 고르고, 함께 밥을 먹던 그 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곤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앞으로 나랑은 절대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는 현지의 음식을 사랑하고 위생은 안중에 없으며 식도락이 가장 중요한 나와는 극과 극에 있는 친구다. 조만간 번외편으로 마리의 여행지론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하노이 뿐 아니라 캐나다의 도시들, 강릉,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경주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함께 했던 여행은 언제 떠올려도 기분이 좋다. 다시 가고 싶다. 정확하게는 함께 갔던 '그 곳'을 다시 방문하고 싶은 게 아니라 목적지가 어디가 됐든 '함께' 했던 시간으로 가고 싶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
평범한 직장인으로,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나에게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 다른 곳에서 각자의 임무를 무탈히 소화해내느라 바쁘다. 그런 와중에 특정한 날짜에 그 임무들로부터 '다같이'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곤 며칠동안 내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연속된 하루들을 온전히, 통째로! 이것은 바삐 돌아가는 현대사회에 기적처럼 느껴지기까지한다.
이런 것에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현상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이 세상 혼자 살아갈 것 같던 내가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여행 앞에서 설레다니!
관계의 형상을 가진 인간
기독교에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신비한 '론'이 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세 개의 다른 존재지만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몹시도 신비한 개념이기에 굳이 그것을 여기에 설명하진 않겠다.(물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창세기 1:26
이것은 우리가 신처럼 생겼다거나 신처럼 행동한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 세 개의 존재가 어떤 '관계' 를 가지듯이 그 모습을 따라서 '관계적 존재'인 인간을 창조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신'이므로 '완벽한 관계', 즉 무한한 사랑을 기반으로한 완전무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피조물인 인간은 자유의지로부터 비롯한 불완전한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한다. 아무튼 우리는 '관계'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물며 그 관계가 완벽하지 않아 때로는 골칫거리일지라도!
짜증이 날 수도 있긴 하다만
분명히 내가 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시작날을 앞두고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여행이라는 것이 도오오오대체 뭐기에 이렇게 강박적으로 떠나려 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따뜻하고 편하고 안전한 집을 떠난다는 것, 즉 안전지대를 벗어난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는 합리화, 주지화*, 부정 등 온 세상 천지의 방어기제를 총동원하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화*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지적인 분석을 통해 문제에 대처하고자 하는 심리적 현상을 뜻한다. ... 주지화 때문에 새로운 도전이나 모험을 즐기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안전지대에 계속 갇혀 있을수밖에 없다.
- 피터 홀린스, 어웨이크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놀랍게도 예외다. 설레고 기쁜 일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떠난 여행을 몇 번 다녀온 후엔 내가 먼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한다. 조금은 번거로울수도, 짜증이 날수도, 더 많이 이해하고 배려해야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놀라운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죽기 전 눈을 감았을 때 젊음을 바쳐 일에 빠져들던 순간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