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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ka Sep 18. 2019

어디로 떠나느냐가 문제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안땡기는 목적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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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잠이나 자자

여행에서 흥미요소를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순식간에 기동력을 잃는다. 무엇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회비용이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충분히 행복해 마지않는 일상 대신 긴 여행길을 택하려면 그 선택으로부터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많아야, 즉 기회비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얻는 것이 없거나 아주 뻔한 것이라면? ‘돈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고 귀찮아 죽겠는데 때려쳐!’ 가 목까지 차오른다.


게다가 내게는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견디는 일이 몹시 힘들다. 10시간 여의 비행이 끝나면 무릎, 허리, 엉덩이 등 온 몸이 아파서 여행 둘째날까지도 컨디션 회복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러니 비즈니스를 끊을 배짱은 없다는 것은 세상 제일 억울한 일이다.


습관적으로 떠나던 여행의 문제

양치를 하며 떠오른 설득력없는 몇가지 이유(전편에 구구절절 나열해뒀다)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습관적으로 하던 여행 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이 젊음과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결혼하면 더이상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침울한 마음에서, 여건이 될 때 최대한 땡겨(?)가야한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비행기표를 끊고 있었다. 목적지는 대부분 유럽이나 미주의 큰 도시들 + 약간의 교외지역이었다. 그건 그저 첫인상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략적으로 목적지를 아래처럼 분류하자면 나는 습관적으로 관광지도시 혹은 마을 중심으로 여행루트를 짜왔다. 관광지는 여행경험이 없는 상태에선 필수였고, 그 다음 쉬운 선택지가 도시나 작은 마을이었다.


- 도시 혹은 마을 (과 그 주변의 관광지)

- 온화한 이국적 자연 (관광지일 수 있지만 자연이 주인)

- 험난한 자연

- 제3세계

- 휴양지


스위스나 캐나다 PEI(Prince Edward Island) 국립공원같은 온화한 이국적 자연-특수한 장비가 없이도 접근가능하며 사고위험이 크지 않은 자연경관-도 여행 일정 중의 일부였지만 주목적지는 아니었다. 잠깐씩 들여다본 어마어마한 자연경관은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자연얘기하는 데 갑자기 웬 랍스터...


모험적인 성향이 필요한 험난한 자연제3세계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떠나온 상태 그대로 온전하게 온실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병약한 직장인이다. 논리적 세계라면 모를까 물리적 세계에서는 전혀 모험적인 성향을 띄지 않는다. 내가 탐험가적, 기자적 사명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고행을 여행이라 부르고 싶진 않았다.


휴양지와 같이 소비적이기만 한 여행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가족여행이나, 신혼여행, 혹은 칠순여행(?) 같은 때에나 가려고 후보지로 올려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요즘같으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러, 말하자면 나를 고립시키러 한 번쯤은 떠나보고 싶지만 단지 그런 목적이라면 땡처리하는 20분 거리의 호텔에서도 가능할 것 같긴 하다.


자연이라면..!

문제는 내가 주로 방문한 곳이 도시나 마을이나 관광지였다는 점이었다. 그 목적지들 앞에서 나는 게을러졌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선택지는 ‘자연' 만 남았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유력한 후보지가 이탈리아 돌로미티 혹은 스위스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돌로미티 (출처: Dieter Meyrl, Getty Images)


프레데릭턴에서 보았던 쏟아질듯한 별들, 마드리드로 가는 경유비행기에서 본 무수한 별들과 기내에서 켜둔 등으로 착각할만큼 밝고 맑았던, 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인공적으로 보였던 동그란 달, 스위스에 끝도 없이 펼쳐진 산과 눈과 절벽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면 언제든 다시 떠날 의지가 생긴다.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히 따져본다. 위 사진같은 광경을 사진이 아니라 눈 앞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의 그 감상은 뭐랄까, 세상의 어떤 신비로운 '섭리' 같은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루하루 코 앞에 닥친 일들을 해치우며 살 때는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들 말이다.


인간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는 있을지언정 만들 수는 없는 것.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든 전혀 상관치 않고 고고하게 제 모습을 지키며 존재하는 자연. 그래서 내 일상에 끌어당겨올 수 없고, 익숙한 나의 공간과 시간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것.


그 장엄함 앞에 서면 인간이 얼마나 작고 이 세계는 얼마나 큰지 떠올린다. 인간의 나약함을 보고, 그에 비하여 신의 창조는 얼마나 위대한지를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아등바등 조급히 살아봐야 육체는 언젠가 다시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갈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스위스 리기 산


그래서 게으름을 이겨내고

이런 논리적 깨달음이 항상 머릿속에 남아있을리 없다. 열심히 쳇바퀴를 타고 있노라면 언제나 훌훌 잊어버리고 그저 좋았노라는 '감상'만 깊이 체화.


그래서 게을러터진 현재의 나 자신은 부지런떨었던 과거의 내 자신을, 왜 또 뭐 때문에, 대체 왜 집을 떠나 고생을 사서 하냐고 원망하면서도 지독하게 앞뒤가 다른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아, 몽골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그 어마어마한 지평선과 쏟아지는 별들을 보고싶어.’ ‘그랜드캐년을, 마치 그래픽같은 대자연을 눈으로 보고싶다.’ ‘캐나다나 노르웨이에서 오로라를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와 같은...


마드리드로 가는 경유비행기 안에서의 야경. 별과 달은 담을래야 담을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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