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번째 리뷰_소주 이야기
마침내 소주에 대해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살림지식총서 533편 <소주 이야기>를 사 보았다. 신문기자 출신이기도 한 저자 이지형의 글이 참으로 소주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소주는 나의 20대를 지배했던(여러 가지 의미로) 술이고, 30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술이기도 하다. 소주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에 대해 이제야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늦은 감마저 있다. 다른 술친구 또는 술후배들은 같은 과오를 하지 않게끔 도와주기 위해 간략한 북리뷰를 썼다.
소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화학적 성분이나 마케팅 전쟁 같은 것들은 듣는 사람을 지겹게 만든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으면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의 접근법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마시는 소주(燒酎)는 사실 진짜 소주(燒酒)가 아니라고 일갈하면서도 금세 마음을 풀고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끄집어낸다. 가짜 소주라는 말에 불편했던 마음이 김승옥이라는 이름에 누그러든다.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나는 이 소설의 이러한 시작을 사랑한다. 선술집에서 파는 세 가지 종류의 술에 소주가 들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가난뱅이인 것이 분명한 이들이 마실 수 있는 술이란 사실 소주나 막걸리 정도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쯤에서 나는 저자에게 마음을 연다. 기실 나보다 한참이나 기자 선배이자 인생 선배인 것이 분명할 테지만, 원래가 이 세계는 글빨로 승부를 보는 것이다. 이 정도로 소주 이야기를 전개할 능력이 된다면 수긍하고 찬찬히 글을 읽게 된다.
소주는 우리의 생각보다 복잡다단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출발은 참으로 멀다. 전통 소주로 유명한 지역을 떠올려 보자. 안동, 진도, 개성. 이런 지역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몽골이다. 몽골 군이 고려를 점령하고 세운 요새가 있던 지역이다. 전통 소주는 바로 몽골에서 유래된 셈이다. 칭기즈칸이 마시던 독주인 아라크가 우리의 소주로 바뀐 것이다. 지금도 아락이나 아랑 같은 이름이 전통 소주 브랜드로 쓰이고 있다. 소주는 전사들의 술이었다.
동시에 소주는 실향민의 술이었다. 안동이나 진도에서 아무리 전통 소주를 만들었다 해도 소주는 역시나 북방의 술이었다. 몽골 군이 물러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 전통 소주는 왕족을 비롯한 소수 지배계급만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조선 말기에 가서 민간에서 소주를 즐기기 시작했다지만, 높은 도수의 소주가 널리 퍼진 것은 북방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남방의 술은 막걸리였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에 의해 소주가 한국에도 정착된 것이다.
소주의 역사는 참으로 기구하다. 전사의 술이자 실향민의 술이었다. 우리가 소주를 마시며 삶의 고난과 애환을 털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소주는 그러기 위해 만들어졌으리라. 기쁨과 축하를 위한 술이 아니다. 고난과 애환을 달래기 위한 술이다.
이 책은 소주의 다양한 면모를 담고 있다. 2006년에 출시된 처음처럼의 초창기 광고 모델이 자우림의 김윤아 였다는 사실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고은 시인이 1년 동안 소주 1000병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눈길을 잡아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것은 소주에 대한 우리의 애착 때문이다.
누군가 "술 마시겠느냐" 물어보면 "술밖에 마실 게 무엇이 또 있느냐"하고 대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