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번째 리뷰_밝은 방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을 담은 <밝은 방(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텍스트다. 이 책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애절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이 책에서 내 마음을 움직인 부분도 어머니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깊은 사랑이 표출된 부분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주 전공인 기호학을 활용해 기존에 없던 자신만의 사진 철학을 만들어냈다. 밝은 방(카메라 루시다)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철학의 집대성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사진 철학들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이 오히려 내 마음에 더 와 닿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진은 모두가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공적인 사진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일까. 모든 사진은 개인적인 것일 때만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인 맥락에서 벗어나는 사진들은 롤랑 바르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끝이 닳아서 없어져버리는 유기물에 불과했다. 예컨대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위기는 육체를 따라다니는 빛나는 그림자이다. 사진이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육체는 그림자가 없게 되고, 그림자 없는 여인의 신화에서처럼 이 그림자가 일단 잘려 나가면, 남는 것은 메마른 육체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가느다란 탯줄을 통해서 사진작가는 생명을 부여한다. 그가 재능이 없어서든 운이 나빠서든 투명한 영혼에 밝은 그림자를 부여할 줄 모른다면, 사진의 인물은 영원히 죽는다."
롤랑 바르트는 '노에마'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른바 '그것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사진이 오로지 노에마 밖에 제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 기술 자체에 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작가들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판을 최대한 삼가지만, 이따금 그의 생각이 드러날 때가 있다. 이런 식이다.
"보통 아마추어는 예술가의 미성숙으로 규정된다. 그는 어떤 직업의 숙달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혹은 오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진에서 전문가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마추어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사진의 노에마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진의 전문가라고 불리는 이들은 롤랑 바르트의 입장에서 오히려 아마추어였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기술들, 순간 포착이나 빠른 셔터 속도의 사진, 이중인화 같은 기법들은 롤랑 바르트가 보기에 그들의 예술가적인 미성숙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인물이든 사물이든 무언가가 지닌 고유의 분위기를 포착하지 못한 사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사진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여기 좀 보세요. 이게 내 형이고, 이게 어릴 적 나예요." 밖에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결국 사진은 '보세요' '봐' '여기 있다'가 교대되는 노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나는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무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사진이 지닌 폭력적인 힘,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눈치채고 그것의 올바른 활용법을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답을 어머니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해답이다'하고 딱 부러지게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롤랑 바르트가 말한 빛나는 그림자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사진에 대해서, 어머니에 대해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해답을 고민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 '보이지 않는 가족'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을 '위인이 아닌 약자, 집단보다는 개인, 서사적 역사보다는 일화'라고 해석했다. 침묵하는 소수와 약자를 봐야 한다는 전시 기획자들의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진다.
그러나 이 전시회가 롤랑 바르트의 사진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롤랑 바르트가 봤다면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라는 데 걸겠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이야기했던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관계를 잘못 해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가족' 전시회는 시간을 내서 볼 만한 전시회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철학 자체가 논쟁적이다. 이 전시회에 그의 사진 철학이 제대로 구현됐는지를 따져보는 것 자체로도 흥미로운 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시회 자체의 수준도 무료 전시회라기에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소피 칼, 오를랑, 신디 셔먼, 제프 쿤스, 잔더 등 유명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전시 중이다. 전시 기획자들의 의도대로 전시회를 따라가 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3층 전시장의 낸 골딘의 작품은 이번 전시회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의 사진들(그리고 목소리)는 섬뜩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차분하고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래서 더 전복적이고 아름다운 사진들이었다.
"페미니스트 구호처럼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판타지는 사회 영역 내의 자신의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하고, 정체성을 재정의하며, 이미지의 힘이 개인을 위해 사용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전시 설명 中)
사진은 절대적인 고유한 특수한 것이고, 불투명하고 터무니없는 것 같은 최고의 고유한 우연성이며, 고유한 어떤 것이고, 요컨대 지칠 줄 모르는 표현을 지닌 순수한 우연, 고유한 기회, 고유한 만남, 고유한 현실이다. 현실을 지시하기 위해 불교는 수냐, 즉 공을 말한다. 그러나 보다 잘 말하기 위해 타타타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의미는 그런 상태의 사실, 그렇게 되어 있는 실상,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트(tat)는 그것을 의미하며,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키고 그, 거, 그것!이라고 말하는 동작을 생각게 할 수도 있으리라.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런 동작의 끝에 있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사진들을 보여줘 봐라. 그는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꺼내고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여기 좀 보세요. 이게 내 형이고, 이게 어릴 적 나예요." 결국 사진은 '보세요' '봐' '여기 있다'가 교대되는 노래에 불과하다.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나에게 풍경 사진은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풍경의 본질은 내 안에서 (전혀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머니를 남몰래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리라.
옴브르단의 실험에 따르면, 흑인들이 영화의 화면에서 보는 것은 마을의 넓은 광장 구석을 지나가는 작은 암탉뿐이다. 내가 보는 것은 옴브르단의 흑인들처럼, 중심에서 벗어난 세부 요소이다. 나는 모든 지식, 모든 교양을 몰아내고, 다른 시선을 물려받는 것을 삼간다.
카프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진은 침묵해야 한다. 이것은 '신중함'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침묵의 어떤 상태나 노력에서만 도달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눈을 감으며, 세부 요소만이 정서적 의식으로 올라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진의 본질을 확립하는 것은 포즈이다. 이 포즈의 물리적인 지속은 중요하지 않다. 백만분의 일 초라는 시간에도 언제나 포즈는 있다. 왜냐하면 포즈는 여기서 촬영 대상의 태도도, 촬영자의 기술도 아니고, 읽기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진에서 색채는 흑-과-백으로 된 원래의 진실에다 나중에 덧칠한 도료라는 느낌을 항상 갖는다(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별 중요성이 없다). 색채는 나에게 추가로 덧붙여진 것이고, (시체에 칠해진 것과 같은) 화장분이다. 즉 촬영된 육체는 덧붙여진 빛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광선을 통해서 나와 접하러 온다는 것이다.
사진은 폭력적이다. 그것이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매번 그것이 시각을 힘으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거부되고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때로는 사진이 부드럽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이 사진의 폭력과 모순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설탕이 부드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아마추어는 예술가의 미성숙으로 규정된다. 그는 어떤 직업의 숙달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혹은 오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사진에서 전문가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마추어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가 사진의 노에마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육체를 따라다니는 빛나는 그림자이다. 사진이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육체는 그림자가 없게 되고, 그림자 없는 여인의 신화에서처럼 이 그림자가 일단 잘려 나가면, 남는 것은 메마른 육체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가느다란 탯줄을 통해서 사진작가는 생명을 부여한다. 그가 재능이 없어서든 운이 나빠서든 투명한 영혼에 밝은 그림자를 부여할 줄 모른다면, 사진의 인물은 영원히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