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쓴 SF소설은 변화와 진보의 문학이다

69번째 리뷰_당신 인생의 이야기

by 이기자

SF소설이나 과학소설은 변화의 문학, 진보적인 문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이작 아시모프나 필립 K.딕 같은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이 분야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판타지 문학과 SF문학을 같은 범주에 놓고 있었던 것 같다. '판타지나 SF나 그게 그거지 다를 게 뭐가 있나' 이런 생각 말이다. 그런 내게 SF소설이 변화의 문학이라는 말은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 말은 독립잡지 <더 멀리> 6월호에 실린 한 칼럼에 등장한다. 동굴거미라는 필명의 작가가 쓴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 춤추는 시선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조금 옮겨보자면 이렇다.


테드 창은 과학소설이 '변화의 문학'이라고 했어. 그에 따르면, 용사가 마왕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맞서 싸우면 결국 기존의 가치를 수호하게 하는 판타지는 보수적인 문학이야. 반면 SF는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핵심으로 하는 문학이지.(중략) 만약 우리가 테드 창의 견해를 받아들여 <오즈의 마법사>를 SF로 개작한다면, 도로시는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어"라고 중얼거리며 모험에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오즈의 시민권자가 되어 그곳의 낯설고 이상한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고, 그것들이 자신의 육체와 마음에 일으키는 변화를 지적으로 성찰하며 영원히 거기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지.


이 칼럼을 읽고 SF문학에 대한 나의 무지에 나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뻔하다고 생각하고 읽지도 않았던 것들에서 내가 놓쳤을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내 눈 앞을 숭숭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두말하지 않고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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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테드 창은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계 이민 2세다.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클라리언 워크숍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 첫 번째 단편인 <바빌론의 탑>을 발표했고 이후 종종 중단편 소설을 하나씩 내고 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1990년부터 2001년까지 발표한 8편의 소설을 싣고 있다.


테드 창의 SF소설은 이 분야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적인 독자들의 편견을 깨부순다.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SF적인 상상력이나 과학적인 치밀함에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더해진다. <지옥은 신의 부재>를 읽고 나서는 한 동안 벙찐 채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SF소설을 썼다면 <지옥은 신의 부재>와 같이 썼을 것이다.


테드 창은 이 책의 번역자인 김상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은 사색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었지 주류문학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과학을 메타포로 쓰려는 시도에는 관심이 있었습니다만. 본리 주류문학 작가의 경우 과학은 오로지 비유로서 가능하지만, SF에서는 비유인 동시에 서술적인 맥락에서도 과학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중략) 제가 그렉 이건의 작품에 감탄하는 이유도 철학적인 질문의 핵심에 한없이 접근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과학적인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은 이런 사유를 실제로 쓰이는 과학의 용어로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SF가 가진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드 창 같은 작가에게는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구분이 필요없다. 오히려 과학적인 사고를 더 폭넓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테드 창의 소설이 웬만한 순수문학보다 철학적인 질문의 핵심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중단편들은 하나 같이 아름답고 독창적이고 재미있다. <바빌론의 탑>과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네 인생의 이야기>와 <일흔두 글자>는 언어를 통한 소통의 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계기가 되고, <영으로 나누면>과 <인류 과학의 진화>는 인간의 손을 떠난 과학의 발전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하게 해준다.


친구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어렵다. 친구의 취향과 독서 습관을 알아야 하고, 평소에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지를 모두 알아야 만족할 만한 책을 추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조건들을 모두 무시하고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몇 권의 책 목록이 있는데,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이 목록에 넣기로 했다.


독립잡지 더 멀리 http://cafe.naver.com/THEMERLY

테드 창 저자 소개 http://www.bandinlunis.com/front/product/detailProduct.do?prodId=241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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