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리뷰_10월의 시 읽는 밤
시란 무엇인가?
이날의 모임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다.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
조지훈의 말처럼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인가?
공자의 말처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는 것"인가?
워즈워드의 말처럼 “넘쳐 흐르는 정감의 발로”가 시인가?
고래사냥의 배창호 감독은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영화관이 그가 좋아하는 시로 표현되는 낭만적인 지점이다.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 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독서모임 멤버들과 시 읽는 시간을 가졌다. 직접 써온 자작시를 한 편씩 읽고, 각자 좋아하는 시도 한 편씩 준비했다. 북한산 송추계곡의 해지는 시간에 모여 시를 읽고 읽었다. 독서모임 멤버들이 가져온 애송시를 소개해본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눈이 그녀의 모국어로 무엇이냐고 묻자
공작새보다 큰 눈을 깜박이며 아크라고 했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별을 묻자
순다르 타라라고 했다 아름다운 별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밝음은 로스니, 어둠은 안데라
세 개의 모음으로 된 내 이름을 소개하고
일곱개의 모음으로 된 그녀의 이름을 외우며
서툰 글씨로 그 이름을 다 쓸 수 있기도 전에
우리의 만남은 끝이 났다
더 많은 모음을 가진 그녀의 아버지가
생소한 자음들을 가진 늙은 천민에게
그녀를 시집보냈고
그 후로 그녀의 소식을 알 길 없었다
나무는 페러 강은 나디 연못은 탈라브
당신을 사랑해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런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피르 밀렝게라고 말했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새로운 모음들을 가진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내 옛 수첩에는 아직 묻지 못한 단어들이
그토록 많은데
바람은 하와
비는 와르샤
그녀가 좋아하던 파란색은 닐라
가슴은 딜
별은 타라
더 가까이서 깜박이면
지친 새처럼 내려오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별은 시타라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비문)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 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 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송이가 허리를 휘이청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끝에도
온기는 남아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나 어린 처녀 때
가랑이에서 물컹 살점 떨어지는 기미 있었는데
“꽃 비치는 기라, 말하거래이"
어머니 일러두었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꽃은 아닌 것 같아
문 걸어 잠그고 나 그걸 종이에 묻혀 보았는데
살점도 아니고 붉은 피도 아니고
꽃은 더욱 아니었는데
첫 경도를 종이에 바친
종이와 관계한
죽어도 끊을 수 없는
내가 가야 할
숙명적 비망록.
시란 무엇인가?
독서모임 멤버의 아버지 한 분이 함께 하셨다. 2012년 문학세계를 통해 등단하신 신남선 교수님은 시에 대한 이야기를 중간중간 곁들여주셨다.
"시로부터 해방을!(리베라시오 포에시스!)"
시인의 고통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이 쓰신 글에 따르면 시라는 것은 견고한 우리에 갇힌 상상력의 수인에게 한 줄기 빛으로 화답한 것이다. 일상이라는 우리에 갇혀 매일 똑 같은 삶을 반복한다고 믿는 우리에게 시가 한 줄기 빛, 한 줄기 희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 산정
엎어진 공기 하나
한때는
누군가의 밥을 담았고
한때는
누군가의 꿈을 담았고
한때는
누군가의 세상을 담았을
그 그릇
지금은
뜬 구름 한 조각
지나는 바람 한 점
잠시 머물다 간다
형제봉 산정 묘지
이제는
갈 곳 없는 행자의 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