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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주사위는 지구에 안 좋은 쪽으로 던져졌다

열두 번째 리뷰_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by 이기자

존 그레이는 영국의 정치철학자다. 화성남자 금성여자를 쓴 존 그레이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다. 존 그레이의 글은 날카롭다. 읽고 있으면 불편해진다. 존 그레이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상식처럼 받아들였던 많은 관념과 개념을 파헤친다. 존 그레이의 가장 큰 비평 대상은 우리, 인간이다. 그는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에서 인간에 대한 환상을 거둬내는데 초점을 맞췄다. 도덕과 철학과 역사라는 허울을 벗겨낸 인간은 '주변 환경에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고 존 그레이는 말한다. 우리는 화장을 지우고 거울 앞에 서야 한다.


진보는 신화다. 자아는 환상이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존 그레이는 진보라는 개념에 메스를 들이댄다. 인류는 진보하고 있는가? 인류는 진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진보는 환상일 뿐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휴머니즘으로 연결된다. 휴머니즘에 대해 존 그레이는 "휴머니즘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 인류가 이제까지 존재했던 어떤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기독교 시대 이전에는 다음 세대에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누구도 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뿐이다.


"지식과 발명은 향상될 수도 있겠지만 윤리는 대체로 그대로일 터였으며, 역사란 궁극의 의미를 갖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일련의 순환 과정이었다."(11p)


다윈의 주사위는 지구에 안 좋은 쪽으로 던져졌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존 그레이의 질문은 인간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존재는 과연 지구, 자연에 긍정적일 수 있는가. 존 그레이는 회의적이다. 그는 윌슨과 제임스 러브록을 빌려 "다윈의 주사위가 지구에 안 좋은 쪽으로 던져졌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에게 막대한 힘을 가져다 준 진화상의 돌연변이가 지구와 다른 종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지적이다. 제임스 러브록은 인간이 일종의 병원균, 암세포, 종양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하는데, 사실 이런 지적을 반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많은 사람이 지구와 환경, 다른 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진정으로 지구와 환경, 다른 종을 보호하는데 성공한 적은 없다. 인류가 발전할수록 지구는 빠르게 파괴되고 있다. 현재 멸종 속도가 자연 상태에서의 멸종 속도보다 최소 1000배 정도 빠르다고 한다. 가속페달을 누르는 것은 물론 인간이다. 존 그레이는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 자체가 지구에 문제라고 본다. 그는 "지구를 아끼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이뤄지려면, 지구 자원을 세심하게 살피는 인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지구를 아끼는 일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존 그레이는 인간도 동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은 도덕심도 이기심도 아닌 단지 순간의 필요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인간도 동물의 하나라면, 인류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존 그레이는 "역사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구름의 모양에서 규칙성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초인이라는 허무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칸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비유도 흥미롭다.

"칸트를 가면무도회에 참가한 사람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저녁 내내 그녀를 정복하겠다는 헛된 희망으로 가면 쓴 여인과 사랑 놀음을 했는데, 가면을 벗고 보니 바로 자신의 아내였다는 그 사람 말이다."

가면을 쓴 미지의 여인은 과거 기독교에서 이제는 휴머니즘으로 변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희망의 딜레마에서 허우적댈 것인가.


인류가 구세주를 찾는다면, 그것은 오락을 위해서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종교에 대한 존 그레이의 인식은 단순한 허무주의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종교와 신에 의지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존 그레이는 독재자가 인간 사회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를 살핀다. 그는 "나중에 어떻게 변질되건 전제 정치는 억압된 자들의 축제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독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독재를 원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지지 없는 독재는 불가능하다. 나치당은 총칼이 아닌 투표를 통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독재를 원하는가. 존 그레이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우선 거부하기 힘든 독재의 유혹이 있다. 독재자들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약속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그 환상이 언젠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기다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심문관의 주장은 옳다.

두 번째 생각해볼 점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다. 루소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과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존 그레이는 "몇몇 사람들이 자유를 추구한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자유를 원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날아다니는 물고기가 있다고 해서 나는 것이 물고기의 본성이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한 것은 예수가 아닌 성 바오로라고 존 그레이는 지적한다. 기독교는 구세주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로마 신비주의 종교의 결합이다. 죄와 구원에 대한 믿음도 여기서 등장한다. 존 그레이는 이 같은 기독교의 전략에 코웃음을 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류는 구세주를 너무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구세주들에게서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인류가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기보다 구세주들이 인류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인류가 구세주를 찾는다면, 그것은 오락을 위해서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156p)


테크놀로지를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느냐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지 않다


21세기는 과학이 종교인 시대다. 사람들은 과학의 발달을 인류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20세기 공중전화와 21세기 스마트폰을 비교하면 삶이 편리하고 문명이 발달했다고 느낀다. 실제로 과학기술은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바로 들을 수 있고, 지구상에 가지 못할 장소도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이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 그레이는 "(과학이) 인간의 욕구를 바꾸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욕구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지식에는 발전이 있지만 윤리에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과학기술(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테크놀로지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느냐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인류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존 그레이는 휴머니즘, 인류의 역사, 진보 같은 개념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 그는 "진보는 신화다. 자아는 환상이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다. 굳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을 들자면, 이성의 노력이나 도덕 원칙을 지키는 능력이 아니라, 유독 파괴적이고 약탈적인 종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런 존 그레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누군가는 그가 인류의 진보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회의주의자라며 공격한다. 하지만 존 그레이는 진보를 믿지 않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답한다. 오히려 그는 "진보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저지른 무지막지한 폭력의 근원"이라고 비판한다. 인류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세상에는 불행이다.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다. 인류가 세상을 구할 수 없는 이유다.


존 그레이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는 1980년대 대처리즘을 옹호했지만, 1990년대에는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자가 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존 그레이의 일관된 입장, 인류의 종국적인 목적이란 없다. 거대 기획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을 감안하면 이런 입장 변화는 당연해보인다.


그는 정치의 역할을 이렇게 평한다.

"인류의 종국적 목표를 향해 가는 거대한 기획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악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임시변통들을 만드는 지혜와 용기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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