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리뷰_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스트릭랜드는 고갱이 아니다. 서머싯 몸은 고갱의 삶을 가져와 스트릭랜드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냈다. 고갱의 삶에서 낭만적이고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져와 단순하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이 고약한 천재 화가를 만들어내면서 서머싯 몸이 자기 스스로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을 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서머싯 몸은 자신의 책에 이런 종류의 감동에 대해 슬며시 적어놨다.
"작가는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조해 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비록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렇다. 셰익스피어도 이아고를 고안해 냈을 때, 달빛과 상상의 실을 엮어 짜 데스데모나를 상상해 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197p)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라는 천재 화가를 만들어내면서 그에게 강렬한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세속의 잣대와 기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한 강렬한 동기가 필요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예술에 사로잡힌 영혼이 말이다.
스트릭랜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굴레를 하루 아침에 던져버린다. 그는 자신을 찾아 온 내레이터(화자)에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라고 소리친다.
런던의 직장과 가족들, 40년을 쌓아온 인간관계들은 스트릭랜드에게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비웃는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저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스트릭랜드에게 양심은 더 이상 행동의 기준점이 되지 않는다. 내레이터는 스트릭랜드를 보며 우리 안의 양심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은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가? 양심이 예술에 대한 순수한 집념과 열정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양심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내레이터는 이 순간 스트릭랜드의 삶에 매료된다. 그는 스트릭랜드가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하는 것에 대해 못 마땅해하지만, 실은 그 자신도 이미 이 순간 스트릭랜드에게 감명받은 셈이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76p)
창세의 순간을 목격했을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예술가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 홍상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배우 정재영이 술을 마시다 옷을 벗는 정도의 행동이 아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가족들을 버리고, 자기를 죽음에서 살려준 동료를 배신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냉대해 자살에 이르게 한 이 예술가의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스트릭랜드와 우리는 '달'과 '6펜스' 만큼이나 머나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일상의 따분함을 견디며 아무런 예술적 성취 없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우리가 비상식적이다. 서머싯 몸은 아무런 고뇌 없이 잘 팔리는 그림만 그리는 스트로브를 등장시켜 스트릭랜드의 삶과 대비시킨다. 스트릭랜드로 인해 스트로브의 삶이 파탄 나지만, 스트로브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트릭랜드에게 경외심을 느낀다.
스트릭랜드는 삶과 죽음, 세상의 인정이나 빈곤, 심지어 자신을 죽게 만드는 육체의 질병까지도 넘어섰다. 그는 자신의 문둥병을 동정하는 사람들까지도 경멸한다. 마지막 1년 그는 눈까지 멀었지만, 오히려 그의 그림은 더욱 본질에 접근한다. 닥터 쿠트라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걸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의 순간을 목격했을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293p)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완성함으로써 예술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자신의 여정을 마친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미지의 영역을 보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수많은 굴레에 갇힌 채 꼼짝달싹하지 못 하는 동안에 말이다. 진정한 예술가에게 양심과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예술가의 개성이 반드시 인격의 파탄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령 그럴지언정 우리가 그의 인격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3차원만을 인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가운데 3.5차원이나 4차원을 인지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의 발걸음을 예의 주시할 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6펜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영국에서 행운의 상징으로 쓰인다.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오크니섬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스푼에 6펜스 은화를 담고 거기에 위스키 한두 방울을 떨어뜨려 아기에게 마시게 한다.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전통이다. 영국의 전승동요집인 머더구스(mother goose)에도 신부를 행복하게 해주는 주문으로 6펜스가 등장한다. 스트릭랜드는 이 모든 행운과 행복을 발로 걷어차고 스스로 달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다. 달과 6펜스를 다시 읽는 매 순간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를 되물었다.
나로 말하면 지금까지 젊은 세대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어왔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마도 키츠보다 더 열렬하고, 셸리보다 천상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이 있어 벌써 세인이 기억하고 싶어 할 만한 시들을 발표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알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세련됨에 감탄을 금치 못하거니와 그들이 보여주는 문체의 절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쓰는 말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하여도 그들이 내게 해주는 말은 하나도 없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느끼는 것도 너무 분명하다. 나는 그들이 허물없이 내 등을 두들기는 태도나 내 가슴을 향해 격정적으로 뛰어드는 그런 감정을 견딜 수 없다. 내게는 그들의 열정이 어딘지 빈혈 증세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꿈도 약간 따분하게 느껴진다.(19p)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70p)
사랑은 나중에 절로 생기게 마련이라고 장담하면서. 그것은 안전감에서 오는 만족, 재산에 대한 자랑스러움, 누군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즐거움, 가정을 가졌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 등이 어우러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감정도 열정을 막아낼 방비책이 없다.(156p)
사랑에는 또한 약한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 잘해 주고 싶고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기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걸 몹시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은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159p)
성경의 한 구절이 입가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속인들이 자기네의 영역을 침입하면 성직자들은 불경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헨리 숙부는 윗스터블 관할 사제를 이십칠 년이나 지냈는데, 속인이 성경을 인용하면 악마도 언제나 제 좋을 대로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고 버릇처럼 말했다.(30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