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여행기 1편
노래방의 공기가 탁하게 가라앉고 사람들은 저녁식사 때 마신 술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분위기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윤희가 앞으로 나간다. 그녀는 노래방 기계의 숫자 버튼을 하나하나 공들여 누른다. 노고지리의 <찻잔>이 모니터에 나온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윤희.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고 있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감싸 쥐고 있다. 전주가 끝나고 그녀는 조곤조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박자를 놓쳤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리듬을 타고 있다. 그녀는 자신 만의 박자와 리듬을 가지고 노래를 조곤조곤 끝까지 부른다. 그 모습을 보던 최현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 앞에 선채로 천천히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태극권을 수련하던 모습 같기도 하고, 그녀에게 손을 뻗어 잡아달라고 간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끝이 정해져 있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 법이다.
영화 <경주>를 보고 경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신민아가 연기한 '공윤희'와 박해일이 연기한 '최현', 그리고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윤진서가 연기한 '여정'까지. <경주>를 보고 있으면 세 명의 배우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경주'에 가고 싶어 진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경주에 어울리는 단 한 어구를 고르라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이 라틴어 어구를 고르겠다. 경주를 돌아다니면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거대한 무덤이 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보도는 무덤 자락에 끊겨 있다. 경주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 같은 도시다. 나무 합판 위에 툭 튀어나온 못처럼 죽음이 삶의 공간을 침범한 곳. 삶에 서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경주 여행의 둘째 날, 150번 버스를 타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장마철이기도 했지만 해수욕장은 유달리 조용하고 한산했다. 문을 연 가게보다 문을 닫은 가게가 많았고,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 몇을 제외하면 사람도 드물었다. 북쪽으로 몰려간 비구름을 대신해 짙은 해무가 바다 근처의 산자락까지 드리워져 있었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구름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쬈다. 해수욕장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문무대왕릉을 향해 기도하는 이들이었다. 봉길해수욕장은 횟집만큼이나 무속인들이 거주하고 기도하는 공간도 많았다. 한국에 이런 해수욕장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이견대'라는 정자가 있다. 해수욕장에서 도로변을 따라 다소 위태롭게 10여분을 걸어가면 나온다. 이견대에 서면 정면에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이 곳이야말로 삶에 서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대왕의 다짐과 그런 아버지를 멀리서라도 다시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의 소망. 문무대왕과 만파식적에 얽힌 설화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피어난 꽃 같은 이야기다. 이견대는 신라의 보물인 만파식적을 얻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은, 한 번 불기만 하면 적군이 물러나고 가뭄이 해결됐다는 전설의 보물이다.
이제야 그런 보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오래전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이견대에서 헤아려 볼 수는 있다. 이견대에 서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도로변에 위치한 탓에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정자에 올라가 바다를 등지고 한참 앉아 있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어느새 땀이 식었다. 나라의 평화는 몰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경주는 도시 어디에서도 거대한 왕릉을 마주할 수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결에 창 밖을 봐도 능이 있고, 산책을 하다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아도 능을 볼 수 있다. 남천변을 따라 조깅을 하다가도 능으로 이어진 길을 달리게 된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경주에서는 능을 보지 않고는 살기 힘들어요."
영화 속 윤희의 집에서는 거대한 능이 바로 보인다. 커튼을 걷으면 반달 모양의 능이 초록의 대지 위에 솟아 있다. 그 풍경을 경주에서는 피할 수 없다. 최현이 오토바이 폭주족에 놀라자 윤희의 친구가 경주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한다. 삶과 함께하는 죽음. 메멘토 모리는 경주의 일상이다.
경주의 자랑이라는 소고기를 양껏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왕릉이 보이는 곳으로 걸었다. 큰길에서 골목 안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거대한 능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릉원과 달리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출입이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무더위를 피해 능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름밤을 나고 있었다. 우리도 능 앞의 벤치에 앉았다. 어둠이 능 위에 내려앉았다. 하얀 구름이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이따금 구름 사이로 불빛이 깜빡거렸다. 아마도 비행기 불빛이었을 테지만 현대화된 별빛이라고 여김직 했다.
능 사이에 난 길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고, 교복을 입은 어린 커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지나갔다. 자전거를 끌고 조용하게 지나가는 이도 있었고, 능 뒤의 잔디밭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능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경주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그 거대한 죽음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풀밭에 누워 한참 동안 경주의 밤과 어둠을 즐겼다.
낮에 본 어느 능에는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자라 있었다. 삶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죽음을 경원시하지만 죽음 없이는 새로운 생명도 없다. 탄생은 죽음 덕분에 경이로운 것이고, 우리는 탄생의 가능성을 마음속에 품고 있기에 죽음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손으로 쌓아 올렸을 능에는 이제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자란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왕릉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매장된 어느 왕족의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가 나무에 흡수됐을 것이다. 경주에서는 이런 삶과 죽음의 순환 구조가 사람들의 눈 앞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경주의 사람들이 능 앞에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능이 아니라 자연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 <경주>에 나오는 봉자개의 그림 속 시구가 생각났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