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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Jul 08. 2016

춘화(春畵)를 찾아 경주의 찻집으로

경주 여행기 2편

영화 <경주>의 한 장면. 찻집에서 만난 최현(박해일)과 공윤희(신민아).
아쉽게도 찾아간 날은 문이 닫혀 있었다.

경주에 간다고 하니 지인이 "춘화(春畵)를 꼭 찾으라"고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이 말을 웃어넘겼다. 경주까지 가서 춘화라니. 하지만 서울에 돌아온 지금은 '춘화'가 경주 여행에서 얼마나 중요한 메타포였는지 이해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삶과 죽음은 우리의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보통의 도시는 일상적인 삶의 공간이고 죽음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나 일상의 공간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경주는 죽음을 기꺼이 껴안고 살아가는 도시다. 거대한 능은 경주 시민들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를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생각할 것은 아니다. 경주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기에 오히려 삶의 풍경이 더 생생하다. 찻집에 걸린 한 폭의 춘화에서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은 기억 속의 춘화를 찾아 경주로 떠난다. 친한 선배의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한국에 돌아온 최현은 몇 년 전 경주 여행에서 봤던 춘화를 기억해낸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경주의 찻집 '아리솔'에 이른다. 그곳에서 분명 춘화를 본 기억이 있지만 찻집 어디에도 춘화는 없다. 아리솔 주인인 공윤희는 찻집을 맴도는 최현을 이상하게 여긴다. <경주>의 중반부까지 찻집의 춘화는 최현과 윤희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춘화가 어쩌면 삶과 죽음의 매개체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춘화는 영화로 보아도 매력적이고 기묘했다. 춘화가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경주까지 갔으니 춘화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능포다원의 다기. 구름과 새가 그려진 운학잔의 자태가 곱다.

그렇게 춘화를 찾아 처음 향한 곳은 '아리솔'이었다. 봉길해수욕장과 감포항 구경을 마치고 경주 시내에 돌아오자마자 아리솔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아리솔의 나무문은 닫혀 있었다. 대문 밖에서 안뜰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최현과 윤희가 등을 맞대고 천천히 한 바퀴 돌던 장면, 최현이 일본인 관광객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던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리솔을 나와 '능포다원'으로 향했다. 이 곳에서도 <경주>를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능포다원에서 영화를 찍다가 주변 소음 때문에 아리솔로 옮겼다고 했다. 아리솔을 가지 못한 아쉬움을 능포다원에서라도 달래려고 했다. 아리솔에서 50여 미터 정도를 걸으면 경주에서 가장 큰 능이라는 봉황대가 보인다. 능 위에 아름드리나무 세 그루가 자라 있다. 능포다원은 바로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복잡하지 않은 경주 시내이니 찻집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은 없다. 더군다나 멀리서도 대나무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그 파릇한 소리를 쫓아 가면 거짓말처럼 능포다원이 앞에 나타난다. 찻집 안뜰에서 사진을 찍고 있으면 어느새 주인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가게에 들어서면 주인이 다소곳하게 인사하고 자리로 안내한다.

안에서 바라본 능포다원의 대나무 정원 모습. 대나무가 주변 건물을 가려줘 신비로운 느낌을 더한다.
능포다원 창가에는 신민아와 박해일의 사인이 놓여 있다.

아리솔도 마찬가지지만 능포다원도 아담하다. 대나무가 보이는 창가 자리가 두 개 있고, 안쪽 방에 공간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 작은 공간을 찻잔과 그림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안쪽 창가 자리에 앉자 <경주>에 나왔던 춘화가 보였다. 이렇게 쉽게 춘화를 찾아낼지 몰랐기 때문에 멍하게 그림을 바라봤다. 


갈대밭인지 풀밭인지 한쌍의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그 모습을 한 마리 새가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다. 사랑을 나누던 남녀도 새를 바라본다. 풀잎이 제법 날카로울 텐데도 남자는 개의치 않는 듯하다. 배려인지 여자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감싸주고 있다. 기묘하면서 아름답고 웃음이 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픈 그림이다. 영화에서 최현 일행이 이 그림을 보면서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다. 최현은 그림 속의 누구를 닮은 것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경주>를 보고 능포다원에 왔다면 황차를 마셔야 한다. 홍삼 황차와 도라지 황차 두 가지 메뉴가 있다. 홍삼 황차는 일본인 손님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배우 배용준이 이 찻집을 자신의 여행기에 소개하면서 일본인 손님이 한 동안 많았다고 한다. 첫 잔은 찻집 주인이 직접 따라준다. 뜨거운 물을 다기에 부어서 세차를 하고 새와 구름이 그려진 운학잔에 황차를 따라준다. 차를 받고 보니 구름이 차 안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주인이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춘화에 대해 물으니 싱긋 웃으며 남편이 그린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그러면서 잡지 한 권을 보여주는데 동국대 김호연 미술학부 교수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가게에는 주인의 남편인 김호연 교수가 그린 그림들이 가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호연 교수가 영화에도 직접 출연했다는 것이다. 호숫가 근처에서 태극권을 하던 남자가 바로 김호연 교수다. 능포다원의 주인도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극장 상영판에서는 편집됐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이 찾아 나섰던 춘화. 영화 말미에 춘화가 등장한다.
도라지 황차 한 잔.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경주의 허다한 능에서 일상적인 죽음의 경이로움을 느낀다면, 이런 찻집에서는 삶의 여유로움을 깨친다. 뜨거운 물로 우려낸 차를 한 잔씩 마시며 창 밖의 대나무 잎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나무 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언젠가는 그칠 것이다. 나는 바람이 잦아들 때 밖으로 나가면 된다. 멈춰 있는 듯 물 흘러가는 듯 살아가는 곳이 경주다. 차 한 잔에 경주의 삶이 있다.


경주는 걷기 좋은 도시다. 다국적 호텔과 각종 편의시설이 모여 있는 보문관광단지에 가지 않는다면 두 다리로 경주 시내를 모두 돌아다닐 수 있다. 황남동 일대를 걷다 보면 오래전에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일층짜리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건물들마다 수십 년은 된듯한 간판이 붙어 있다. 세탁소와 떡집, 한의원, 점집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일부러 지어놓은 드라마 세트장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세탁소 밖에는 온갖 종류의 옷들이 걸려 있다. 점집에서 쓰는 듯한 울긋불긋한 한복이 하얀 와이셔츠와 함께 햇살을 받고 있다. 총천연색의 옷들만큼이나 이들의 삶도 다채롭다.


아침 식사를 해결했던 팔우정 해장국 주인 할머니의 뒷모습도 기억난다. 경주역 근처에 있는 해장국 골목은 신경주역이 생기면서 손님이 줄었다고 한다. TV 드라마를 벗 삼아 손님을 기다리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의연해보였다. 경주에 간다면 해장국 골목을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메밀묵과 모자반을 넣은 해장국은 서울에서 경험할 수 없는 맛이다.

황남동 골목길의 세탁소 모습이 정겼다. 세탁소 앞에 세워진 자전거의 붉은 색이 강렬하다.
손님을 기다리며 TV를 보고 계신 팔우정 해장국 주인 할머니의 뒷모습. 묵이 들어간 해장국이  별미다.

경주는 밤이 아름다운 도시이기도 하다. 고요한 능 사이를 걷는 것도 좋지만, 아름다운 조명으로 치장한 동궁과 월지도 빼놓을 수 없다. 해질 무렵에 숙소를 나와 첨성대 쪽으로 향했다. 능 사이에 난 길을 걷다 보니 첨성대가 나타났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조명도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둑한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회색빛의 첨성대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첨성대를 지나 조금 걷자 길 건너편에 '동궁과 월지'가 보였다. 내게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곳이다.


입장료를 내고 안에 들어가자 단조롭던 경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별천지가 펼쳐졌다. 고층빌딩이 없는 경주 시내는 밤이 되면 조용하고 잔잔한 느낌이 든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도시다. 첨성대에서 동궁과 월지까지 걸어온 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곳은 달랐다. 커다란 연못을 중심으로 목조 건물이 빙 둘러 서 있다. 조명을 받은 건물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는 문화유적에 인위적인 조명을 씌워서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것을 싫어하지만, 동궁과 월지의 건물들은 달랐다. 이 건물들은 아마도 처음부터 화려하게 빛나기 위해 존재했을 것이다. 본분을 다하는 화려함은 나쁠 것이 없다. 가끔은 조미료도 필요한 게 인생이다. 지금의 건물이야 현대의 기술로 새로 지은 것이겠지만, 그 화려함만큼은 천년을 이어 함께 내려오는 듯했다.

조명이 켜진 동궁과 월지의 모습.
연못을 둘러싼 건물의 처마에서 바라본 밤하늘.
사람들은 천천히 연못가를 돌며 무더위를 잊는다. 이곳은 복원된 유적이라기보다 삶의 공간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난 첨성대. 조명 덕분에 아름다웠지만 나는 쓸쓸한 첨성대가 좋았다.

월지는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구름 때문에 달은 없었지만 대신 건물과 나무의 모습이 연못에 비치고 있었다. 조금씩 일렁이는 연못 물결을 따라 건물의 그림자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못가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늦은 밤 연못가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의 이름을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바꾼 것은 잘 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압지는 쓸쓸한 이름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 곳을 보고 시인들이 '기러기(안)와 오리(압)만 날아든다'고 노래한데서 붙은 이름이 안압지다. 이제는 매일 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여유를 즐기는 공간이니 쓸쓸한 이름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2박 3일의 짧은 경주 여행은 숙소 주인아주머니와 인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번에 묵은 숙소는 황남동의 '라온 민박'이었다. 대릉원과 고분군을 걸어서 갈 수 있는데다 한옥 민박이어서 고른 숙소였다. 결과적으로는 크게 만족했다. 골목길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고 가며 경주 사람들의 일상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느꼈던 실망감을 이 곳 경주에서는 느끼지 않아도 됐다. 민박집주인이 공들여 꾸민 정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볼거리이기도 했다. 유일한 단점이 방음이라고 했는데 장마철에는 숙박객이 적어서 문제 되지 않았다.

민박집에서. 
민박집에서2.
민박집 옥상에서 바라본 황남동 스카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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