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도보여행기
진주(晉州)는 여행하기 좋은 도시이지만, 정작 이 좋은 곳을 제대로 여행한 사람은 드물다.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어린 시절에 서울로 올라왔기에 나 역시 진주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가 없다. 학생 때는 방학마다 진주에 내려가 친척집에 머물렀고, 지금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진주를 갈 일이 생기지만 번번이 가던 곳, 보던 곳, 있던 곳에만 머물다 올뿐이다. 그렇지만 차를 타고 지나치는 진주성과 남강, 진양호의 모습은 내가 도보여행을 할 때마다 꿈꿨던 어떤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푹푹 찌는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7월의 어느 날, 내가 진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이유였다. 차가 아닌 두 발로 걸어 다니면서 진주의 여러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진주를 찾는 이는 누구나 진주성을 볼 수 있다. 진주는 작은 도시가 아니지만 남강변에 자리한 진주성은 진주 어디에서나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 여행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기도 하다. 진주성에 들어서서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으나 한적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진주성의 둘레는 1760m. 지금은 내성만이 남아 있다. 외성은 진주 시가지에 편입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내성도 한국전쟁 때 많이 소실됐지만 지금은 복구가 된 상태다. 진주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촉석루도 한국전쟁 때 불에 탔다. 1960년에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중건했다. 전란을 겪은 도시들은 어디나 파괴된 랜드마크를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랜드마크를 다시 세우는 것은 단순히 유적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구심점, 생명력을 살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진주성과 촉석루가 진주에서는 그런 공간이다.
진주성 정문을 지나 왼편으로 길을 잡으면 촉석루가 보인다. 이날은 진주의 낮기온이 32도를 넘어서는 무더운 날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는데, 촉석루에 오르자 거짓말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촉석루를 내려오면 바람이 그쳤고 촉석루에 올라서면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불과 고도차가 2~3m 남짓할 뿐이었는데 그 선선함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촉석루에 올라서면 진주를 끼고도는 남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난간에 기대어 앉아 한동안 땀을 식혔다. 산책을 나온 진주시민과 대형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저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로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촉석루 아래에는 남강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좁은 길을 내려가면 의암이 나온다. 평평한 바위들 사이에 유독 강 쪽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다. 예전에는 다른 바위들과 마찬가지로 뭍에 붙어 있었는데 갈수록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바위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뛰어내린 곳이다. 원래의 이름은 위암이었는데 논개를 기리는 의미에서 의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의암 앞에는 작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비석이 있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그 바위 홀로 서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강가에 자란 나무 아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덕분에 뜨거운 햇볕을 피한 채로 의암을 볼 수 있었다. 논개 설화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의암이라는 바위가 다른 것들과는 달리 느껴지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믿고 의지해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진주성은 전란과 떼놓을 수 없다. 진주성 어딜 가나 충혼비가 있고, 진주성의 누각 어느 하나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진주성 안에 있는 호국사와 창렬사는 의병들의 집합지이자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의 무대가 바로 이 곳이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관병 3800명과 진주성의 백성 2만여 명이 왜군 2만여 명과 맞서서 승리한 전투였다. 그렇지만 1년 후에 다시 벌어진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왜군이 승리했고, 이때 진주성에 있던 백성과 군인 6만여 명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지금의 진주성은 잘 정돈된 잔디와 나무들이 곳곳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지만, 그런 과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진주성은 한국의 다른 유적지와는 달리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감돈다. 대형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도 이 곳에서는 말소리를 줄인다.
나무 사이에 난 산책길을 걷다 보면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인 국립진주박물관이 나온다. 굉장히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하지만, 내가 방문했을 때는 아쉽게도 지붕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가야 시대의 유물이 가장 많은 박물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작은 박물관이지만 가야 시대의 유물과 임진왜란과 관련된 기록들이 적지 않아 보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진주성 내에서 시원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꼭 필요한 곳이었다. 박물관과 바로 옆 카페에서 땀을 식히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날이 조금 시원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실 진주를 여행하기에 제일 좋은 때는 가을이다. 진주에서는 매 10월 초에 개천예술제라는 큰 행사가 열린다. 진주 남강 유등축제도 개천예술제의 하나로 진행된다. 이 기간에는 사람들이 많아 고즈넉함을 즐기기는 힘들지만, 대신에 날씨만큼은 좋다.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개천예술제 기간을 전후로 해서 진주를 방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진주성을 나와서는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배가 출출해져 중앙시장의 제일식당에서 육회비빔밥을 먹었다. 시금치, 콩나물, 호박, 고사리가 들어가고 거기에 양념한 육회를 비벼서 먹는다. 내게는 화려한 전주비빔밥보다 시장 한복판의 허름한 제일식당 육회비빔밥이 최고다. 특히 선지해장국이 곁들여 나오는데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게 된다. 제일식당은 아침에는 해장국만 판다. 진주 토박이들은 비빔밥보다도 이 해장국을 더 좋아한다. 나도 진주에서의 아침식사는 거의 항상 제일식당 해장국으로 해결하곤 했다.
근처의 천황식당 육회비빔밥도 유명하다. 천황식당의 것이 조금 화려하고 구색을 갖췄다면 제일식당의 것은 군더더기 없고 소박한 맛이 있다. 진주를 여행한다면 두 곳 모두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진주냉면으로 유명한 하연옥은 여름이면 대기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육전을 올려 먹는 냉면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냉면 한 그릇 먹으러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식사 시간을 피해가거나 육전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는 것을 추천한다.
제일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진양호로 향했다. 중앙시장에서 120번 버스를 타고 20여분 정도를 가면 진양호 입구에 선다. 도로 옆으로 도보여행객을 위한 길이 마련돼 있어 좋았다. 나무 사이로 난 데크를 따라 10여분 정도 올라가면 진양호 공원이 나온다. 진양호 공원에는 작은 놀이동산인 진주랜드와 동물원, 호텔, 전망대 등이 있다. 진양호 공원 매점 옆에는 작은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진양호 호숫가에 다다른다. 진양호는 남강댐이 만들어지면 생긴 인공호수다. 그런데 호수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호수 면적만 29.4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여의도 면적의 10배다. 워낙 큰 호수이다 보니 호숫가에서는 이게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안 간다. 작은 물결이 파도처럼 호숫가에 밀려들어 철썩 이는데 아무리 봐도 호수로는 안 보인다. 그렇게 넓은 물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득해지는 기분. 거대한 호숫가에 나 혼자 앉아 햇볕이 반짝이는 물결을 보는 기분. 이런 것들을 위해 혼자서 도보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진양호 전망대에 오르면 호수의 전경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진양호 너머로는 지리산 천왕봉까지 보인다. 내가 오른 날에는 구름이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지리산의 흐릿한 윤곽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진주랜드는 진양호 공원에 있는 작은 놀이동산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왔던 기억이 있다. 거진 15년 만에 찾은 것 같았다. 작고 낡은 놀이동산은 영업 중이었지만 찾는 이는 없었다. 주말에는 아이들이 찾는 듯 한편에 키즈파크 같은 것이 있었지만, 평일의 뜨거운 한낮에는 텅 비어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놀이기구들은 나의 기억 속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진주는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것이 변하고 달라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변하지 않은 것들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런 것들이 퇴락의 징후로 보이기만 한다는 것이 슬플 따름이었다. 아무도 없는 놀이동산에 앉아 푸른 하늘과 멈춰 선 놀이기구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놀이기구에 그려진 캐릭터들은 조금씩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웃는 얼굴만은 뚜렷했고, 놀이동산의 스피커에서는 희망찬 동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뾰족한 나무 숲 위를 지나는 하늘자전거의 레일은 보기만 해도 위태로워 보였다. 놀이동산 바로 옆에는 카페가 있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를 지나 저녁으로 향하고 있었다. 진양호 공원의 산책길을 다시 걸으며 하루 동안의 짧은 도보여행을 마치기로 했다. 나무 숲 사이로 들어서니 햇볕이 사라지고 숲의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진주에도 올레길 같은 도보여행객을 위한 길이 있다. '진주에나길'이라고 하는데 진주 시가지를 가운데 놓고 크게 한 바퀴 도는 방식이다. 1코스는 진주성에서 출발해 비봉산, 선학산 전망대를 거쳐 남강을 도는 15km 코스다. 비봉산과 선학산은 높이가 100m 조금 넘는 산으로 조금 강도 높은 산책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싶다. 2코스는 가좌산, 망진산 등을 도는 코스인데 아무래도 1코스를 많이 찾는 것 같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진주에나길과 진주성 야경도 보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짬이 나지 않았다. 한 여름에 7시간 넘게 도보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