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모으면 폐허에서 꽃이 핀다고 했다. 해수관음성지인 낙산사가 그렇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낙산사는 수차례 화마에 시달렸다.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졌던 절은 세조 때 중건됐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다시 불에 탔다. 한국전쟁 때도 폐허가 됐다. 반도에 자리한 옛 국가들이 외세의 침입을 받을 때면 어김없이 낙산사도 불에 탔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지난 2005년 낙산사는 다시 한번 화마에 휩싸였다. 양양 지역의 대화재에 낙산사도 불에 탔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씩 복원 중이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낙산사를 다녀왔다. 폐허에서 핀 꽃 같은 곳이었다. 지치지 않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을 느끼고 왔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성당이나 절을 가끔 들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성당 만의 경건한 분위기가 좋다. 산속의 오래된 절에서는 숲과 하늘을 온전히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낙산사는 바다와 하늘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절이었다. 낙산사의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빌딩의 억지스러운 직선에 방해받지 않고 바람에 실려가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칠층석탑에는 잠자리 한 마리가 앉았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맞춰 잠자리의 날개도 설핏설핏 흔들렸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천천히 설악산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원통보전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원통보전을 둘러싼 별꽃무늬 담장 앞에 서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겼다. 누군가가 종각의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조용했고 나무들은 고요했고 종소리만 여유롭게 바람에 실려왔다.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해수관음상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음껏 하늘을 만끽했다. 관음상은 근방에서 가장 높은 인조물이었다. 관음상 둘레 어디에서 올려보아도 하늘뿐이었다. 이렇게 맑은 하늘을 실컷 본 게 얼마만인지.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층빌딩이 만들어내는 직각의 모서리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하늘을 닮은 바다는 낙산사의 또 다른 풍경이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지만 하늘은 하늘색이고 바다는 바다색이다. 의상대와 홍련암에서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절벽에 지어진 홍련암은 양양 대화재를 비껴갔다. 파도는 쉴 새 없이 절벽에 부딪쳤고, 구름은 바람에 실려 산으로 흘러갔다. 관음상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은 엎드려 절을 하며 무언가를 빌었고 파도는 철썩거리며 화답했다. 나도 머리를 조아려 몇 가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몰래 풀어놨다. 관음상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어 나의 기도를 들어주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으니 이미 기도가 이뤄진 게 아닌가 싶었다.
낙산사 안의 찻집인 다래헌에 들어가 얼음을 넣은 차를 한 잔 마셨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볼 수 있는 야외찻집이었다. 차를 마시는데 참새떼가 주변에 내려앉아 흙바닥을 쪼아대며 지나갔다. 늦은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참새떼를 비췄다. 다시는 이 곳이 불에 타지 않기를. 기도 목록에 추가하며 절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