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남도여행기
너의 이름은 베티 블루다. 단 하루뿐인 인연이지만 나는 자전거에 이름을 붙였다. 자전거 차체가 시원한 파란색이었기에 베티 블루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여자 주인공이 턱에 팔을 괴고 있는 영화 포스터가 떠올랐다. 자전거 차체의 파란색은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함께 사는 집의 계단색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구례에 도착하자마자 읍내 자전거 가게에 들러 하루 동안 탈 수 있는 자전거를 빌렸다. 자전거 가게 주인은 선뜻 가게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자전거를 건넸다. 하루에 1만5000원.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자전거를 빌리고 작은 생수를 하나 사고 섬진강 자전거길로 향했다.
해가 쨍한 날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자전거를 타기에는 더 좋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고 무작정 섬진강변을 따라 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섬진강을, 오른쪽에는 들판과 낮은 산을 두고 자전거를 달렸다. 다른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따금 들판에서 밭일을 하는 사람들의 등판이 힐끔 보이기만 했다. 연휴를 앞둔 평일인 덕분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세 시간 남짓 자전거를 탔다. 구례에서 시작해 화개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세 시간 동안 방향을 틀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잠시 쉰 것을 제외하면 브레이크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섬진강은 푸르고 넓었고 하늘은 그보다 더 파랗고 광활했다.
브레이크를 잡을 필요 없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문득 생각해보았다. 서울에서는 브레이크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차를 탈 때도 걸을 때도 언제나 속도를 내기보다는 줄이는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바람을 느낄 새도 없이 주변을 돌아보고 멈출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의 의지는 상관없이 멈춰야 한다. 그런 삶이 싫어서 다른 선택지를 찾아보기로 한 것인데,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는 회사 생활을 할 때나 일을 쉴 때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든 일을 쉬든 나의 소속은 서울이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사는 한은 내가 염증을 느꼈던 생활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나마 서울을 벗어나 서울과는 다른 속도감을 느끼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봤다. 구례 섬진강 자전거길에서는 내가 페달을 밟고 있는 한은 브레이크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이따금 얼굴을 스치고 날아가는 풀벌레들만큼이나 나도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례공설운동장에서 짧았던 자전거 여행을 마쳤다. 해가 뉘엿뉘엿 먼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캔맥주를 하나 사들고 공설운동장 앞 잔디에 앉았다.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 운동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운동장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닫힌 문 사이로 운동장을 바라보니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잔디를 뛰놀고 있었다. 해는 그 사이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림자도 길어졌다. 캔맥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