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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Sep 18. 2016

금산산장의 나물밥상과 새벽녘의 남해바다

9월의 남도여행기

구례를 떠나 남해의 절경을 품에 안고 있는 금산으로 향했다. 남해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유일한 내륙이다. 금산의 금은 비단 금(錦)을 쓴다. 금산 정상 부근의 보리암에 가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기도한 곳이 있다. 원래 금산의 이름이 보광산이었는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고 나서 새 나라를 건국하게 되면 산을 비단으로 덮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고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산의 이름에 비단 금자를 써서 금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남해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복곡저수지 근처에서 내렸다. 날씨는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더웠다. 복곡저수지에서 복곡주차장까지 오르는 2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면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복곡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15명이 되지 않아 운행을 안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걸어 오르는데 15도 경사의 도로를 두어 시간 올라야 하는 코스다. 결국 중간에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 보리암 주차장까지 갔다.

보리암에서.
보리암 해수관음상에서.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금산 풍경.

보리암은 한국의 3대 해수관음성지다. 다른 곳은 양양 낙산사와 강화 보문사가 있다. 특히나 보리암은 다른 곳에 비해 기도를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에 올라 바람이 잘 드는 곳에 앉아 땀을 식혔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해수관음상 앞에는 여러 사람이 절을 하고 있었다. 꼬마 아이들이 아버지를 따라 절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해질 무렵까지 시간을 보냈다. 보리암에서는 사람들이 다들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공기도 가벼웠다. 금산을 오르기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보리암을 떠나 금산산장으로 향했다.


금산산장은 이번 남해 여행의 목적이기도 했다. 여행지의 숙소를 가기 위해 여행을 결심한다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금산산장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숙소였다. 보리암에서 10분 남짓 산을 타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절벽에 자리 잡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금산산장이었다. 금산산장은 할머니와 아들이 운영하는 작은 산장이다.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상주해수욕장과 한려해상 국립공원이 한눈에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해넘이와 해돋이의 장관을 볼 수 있지만 이번에는 아쉽게도 해무가 많았다. 그럼에도 금산산장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이지 평생 보아온 어떤 여행지의 풍경보다 대단했다.

보리암 근처 금산산장 풍경.
보리암 근처 금산산장 풍경.
금산산장의 숙소. 한 평짜리 방에서 몸을 눕혔다.

금산산장은 1인당 2만 원을 내면 하루 잘 수 있다. 또 식사도 가능하다. 1인당 8000원을 내면 산나물이 중심이 된 정식을 차려준다. 여기에 산장 주인 할머니가 직접 담근 동동주도 한 통에 1만 원이면 맛볼 수 있다. 해 질 무렵에 산장 앞의 평상에서 정식을 먹었다. 해발고도가 700m에 이르는 금산 정상 부근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산나물에 동동주를 먹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더욱이 주인 할머니가 직접 차린 음식들은 맛도 있었다. 


해가 지면서 붉게 물든 하늘과 어둑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밥을 먹고 있으니 갑자기 해무가 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옆에 놔둔 카메라 가방의 가죽에 물기가 잔뜩 맺힐 정도로 날씨가 급변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장에서 하루를 묵었기에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개에 휩싸인 채로 함께 산을 오른 후배와 동동주 잔을 부딪혔다. 소금기가 조금 섞였지만 신선한 공기를 힘껏 들이켰다. 산 허리춤부터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공기도 금세 싸늘해졌다.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별은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을 수놓은 불빛들만이 반짝거리는 밤이었다.

금산산장의 정식과 동동주.
금산산장의 정식과 동동주.

한 평짜리 작은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옷걸이 몇 개와 이불이 전부였다. 보일러 덕분에 등은 금세 뜨끈해졌다. 음악을 들으며 후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TV가 있고 각자의 침대가 있는 편한 숙소였다면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오후 10시쯤 일찍 잠들었다. 


산에서 맞는 새벽은 남달랐다. 산장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몸을 에워쌌다. 전날보다는 날이 좋았다. 해무도 덜했고 구름도 적었다.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산장에서 조금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금산과 남해 앞바다의 풍경이 더 잘 보였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과 해무 때문에 둥그런 해를 볼 수는 없었지만 붉은 기운이 금세 산을 감쌌다. 보리암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전날 낮에는 그렇게 붐비던 기도객이 거의 없었다. 조용한 암자를 천천히 거닐었다. 해수관음상 옆에는 밤새 타다 남은 촛불이 작은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해수관음상을 한참 바라보다 산장으로 돌아왔다. 속으로 작은 소원을 빌었다. 관음상의 표정은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졌다. 어떤 때는 인자하게, 어떤 때는 근엄하게 보였다. 새벽녘에 바라본 모습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었다.

새벽 보리암 풍경.
새벽 보리암 풍경.
새벽 남해 앞바다 풍경.
새벽 남해 앞바다 풍경.
새벽 금산 풍경.
새벽 보리암 풍경.

하산길은 상주해수욕장 방향으로 잡았다. 차를 타고 오를 수 있었던 복곡주차장 방향과는 달리 오롯이 산길을 내려가야 했다. 금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이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험난했다. 꾸준히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중간에 계곡이 나와 잠시 멈춰 서서 세수를 했다. 차가운 계곡물로 땀을 닦아내자 산을 마저 내려갈 힘이 났다. 다시 기운을 내서 산을 내려오니 오전 8시 반이었다. 도로변에 주저앉아 미조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눈 앞에 방금 내려온 금산이 우뚝 서 있었다. 저 높은 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내려왔다니.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산을 내려왔다는 안도감과 아쉬움, 여행의 목적을 이뤘다는 성취감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복잡다단한 마음이 되었다. 멀리서 미조항으로 가는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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