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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인간을 기다리며

열다섯 번째 리뷰_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by 이기자

"인간의 그 오랜 분석(糞石) 위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인간'을 기다리며"

로맹 가리와 그의 두번째 부인 진 시버그

로맹 가리의 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고독한 유태계 프랑스인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탐구하고 기다렸다.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세계의 끝, 누구도 찾지 않는 해변에서 로맹 가리는 오지 않은 인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너무나 유명한 그의 단편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열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로맹 가리는 단편 한 편마다 인간의 정체성과 그들의 삶에 숨어 있는 순수함,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비록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들이 전쟁과 감옥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할 지라도, 로맹 가리는 모든 것이 떠나버린 황량한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 내면을 더듬고 있다.


로맹 가리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전 아내 진 시버그는 1년 전인 1979년 이미 자살을 택했다. 로맹 가리는 짧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평생을 인간 종의 정체성을 탐구한 로맹 가리가 마지막 순간 온전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남겨진 그의 책뿐이다. 인간에 대한 평생의 탐구와 갈등뿐이다.


열여섯 편의 이야기가 모두 처참하고 아름답지만, 특별히 내가 아끼는 이야기는 '지상의 주민들'이다.


지상의 주민들에는 눈이 먼 처녀와 허름한 차림의 나이 든 남자가 나온다. 그들은 함부르크로 향하고 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날, 함부르크까지는 60km가 남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태워줄 트럭을 기다리며 눈을 맞고 있다.


남자는 말한다.

"넌 큰 충격을 받았어. 하지만 그들은 군인들이었어. 전쟁 중인 야수들이었다구... 남자들이 다 그렇진 않아. 사람을 믿어야 해. 넌 진짜 눈이 먼 게 아냐. 네가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거야.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길을 지나던 트럭 한 대가 멈춰서고 그들을 태운다. 두 사람을 태우고 한참을 달리던 트럭은 갑자기 길 위에서 멈춘다. 트럭 운전사는 남자를 밀어내고 처녀만을 태운 채 출발한다. 남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트럭을 뒤쫓기 시작하지만 달리는 트럭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남자는 한참을 걸은 뒤에야 익숙한 형체를 발견한다.


처녀는 길 한 가운데 서서 꼼짝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 비단으로 된 예쁜 리본은 풀어져 있고 화장은 뒤범벅이 된 채 립스틱이 뺨과 목 위에 번져 있었다. 스커트의 지퍼는 떨어져나가고 없었고, 그녀는 자꾸 흘러내리는 한쪽 스타킹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었다.


남자는 묻는다.

"혹시 그가 네게 나쁜 짓이라도..."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처녀가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표지판에는 함부르크, 120km라고 씌어있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 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그는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딱한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258p)


남자는 "이제 다 왔단다"라고 쾌활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이 특별한 이야기를 읽고 소설가 김인숙의 표현대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트럭 운전사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고, 함부르크로 향하는 두 남녀는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고통을 가하는 인간과 고통을 당하는 인간. 무엇이 인간의 본성이고 본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일 때 진정 인간다운 것인지 로맹 가리는 계속해서 묻고 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산문집인 '인간의 문제'에서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에는 인간을 위한 자리마저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에겐 선택의 순간이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셸 우엘벡이 '소립자'에서 꿈꿨던 신 인류의 출현 말이다. 신 인류에게 우리 인간의 자리를 내줘야 할 지를 놓고 지구의 대표들이 모여 토론하게 된다면, 아마 누구도 합리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로맹 가리가 평생에 걸쳐 탐구했던 그 자취를 되집어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가 우리 인간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릴 수도 있다.


"아버지 시대의 인류는 이제 끝나버렸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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