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읽다익따

소설가들의 소설가에게 글쓰기를 묻다

열여섯 번째 리뷰_작가란 무엇인가 1권

by 이기자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다급한 마음이 든다. 날이 더 추워지기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빽빽하게 약속이 잡힌 다이어리를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그저 시간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으로 약속이 없는 날을 하루하루 짚어가며 하루에 원고지 몇 장씩 써야 할지 계산해본다. 그렇다.

-바람이 차가워졌다는 것은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신호다-


문청(文靑). 누군가는 "꼭 한번 올라가 보고 싶은 산, 신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문청의 꿈인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1년 내내 펜을 놓고 살다가도 이 맘 때가 되면 괜히 한 자라도 글을 적게 된다. 문단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에게 과외를 받는 이들도 많다는 데, 퇴근 후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는 내가 등단할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들 때면 책상 앞보다는 술자리로 발걸음이 향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를 책상 앞에 동여매 주는 책이 한 권 있다.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라는 걸 깨달았다는 말로 시 쓰기를 그만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시에 손을 대보기는 했지만 얼마 후 신이 저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점이 유감스러웠고, 저는 신이 저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지요. 아주 꼼꼼하게, 천천히 알아내려고 애썼어요. 이런 과정이 바로 산문 쓰기이고 소설 쓰기입니다. 소설가는 본질적으로 개미처럼 끈기 있고 천천히 장거리를 나아가는 사람이에요. 소설가는 악마적이고 낭만적인 비전 때문이 아니라 끈기 때문에 인상적이지요."(74p)


오르한 파묵이 내게 말을 건다. 소설을 쓰는데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끈기라고. 미술사를 움직인 것은 기술보다는 의지였다고 누군가 말하기도 했다. 좋은 예술작품을 남기는데 재능과 기술보다 끈기와 의지가 더 필요하다면, 나 또한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다시 펜을 든다.


소설가들의 말 한 마디가 문청들에게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 움베르토 에코, 오르한 파묵, 무라카미 하루키, 이언 매큐언 같은 이들의 이야기라면 더 할 나위 없다.

소설가들의 인터뷰 모음인 '작가란 무엇인가'는 아마도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경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지금은 작품으로만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소설가들의 육성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다른 출판사'가 펴낸 작가란 무엇인가는 세계적인 문학잡지 '파리 리뷰'에 실린 소설가들의 인터뷰 중에 한국에서 사랑받는 소설가만을 추렸다. 작년 1월 첫 번째 모음집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세 편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1편은 작가의 면면을 봤을 때 압권이다.


파리 리뷰 인터뷰에 응한 세계적인 소설가들은 조금씩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된 질문을 받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쓰는지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다른 글을 썼지만 이들의 대답에서는 공통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살아온 소설가들의 대답을 옮겨본다.


무엇을 쓰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어떤 생각을 해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자체는 독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에서 소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생각을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순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랍니다. 늙은 노파를 죽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학 논문에서 그 생각을 표현하면 F를 받겠지요. 소설에서라면 그 생각은 '죄와 벌'이라는 산문 걸작이 됩니다."(움베르토 에코, 37p)

에코.jpg 움베르토 에코

"기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일종의 연료 역할을 하지요. 타오르면서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거든요."(무라카미 하루키, 142p)


"소설은 절대 소진될 수 없는 형식이며, 비관론자가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소설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아요. 소설이야말로 두 낯선 사람이 절대적인 친밀함으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함께 만드는 겁니다. 어떤 예술도 소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예술도 소설만큼 인간 삶의 근본적인 내면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폴 오스터, 182p)


Q. 일인칭 시점과는 다른 삼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현미경으로 보는 느낌이 어떠신가요. 특히 초점을 맞출 때는요? 사물을 눈에 얼마나 갖다 대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고요. 그것은 무엇을 확대하고 싶은지 그리고 얼마만큼 확대하고 싶은지에 달렸지요."(필립 로스, 272p)


"소설 밖의 영역에서 우리는 주장을 맘대로 펼칠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은 철학자든 정치가든 문지기든 자신이 말하는 바를 확신하며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누구도 어떤 단언을 하면 안 됩니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거든요.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을 가설적입니다."(밀란 쿤데라, 296p)


"몇 년 전에 체호프의 편지에서 아주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어요. 그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에게 준 충고였는데, "친구여, 비범하고 기억에 오래 남을 업적을 성취한 비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글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라는 내용이었지요."(레이먼드 카버, 338p)


"저도 악몽을 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꾸는 악몽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글로 쓸 필요는 없지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글에서 생략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특징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생략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작품에 구멍 같은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412p)


소설은 절대 소진될 수 없는 형식이며,
비관론자가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소설은 결코 죽을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특정 시기, 예를 들자면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에 시란 자위행위나 마찬가지랍니다. 하지만 훌륭한 시인은 나중에 초기 시를 불태워 버리고, 별 볼 일 없는 시인은 초기 시를 출판하지요."(에코, 25p)


"저는 시에 손을 대보기는 했지만 얼마 후 신이 저에게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점이 유감스러웠고, 저는 신이 저를 통해서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했지요. 아주 꼼꼼하게, 천천히 알아내려고 애썼어요. 이런 과정이 바로 산문 쓰기이고 소설 쓰기입니다. 소설가는 본질적으로 개미처럼 끈기 있고 천천히 장거리를 나아가는 사람이에요. 소설가는 악마적이고 낭만적인 비전 때문이 아니라 끈기 때문에 인상적이지요."(파묵, 74p)

파묵.jpg 오르한 파묵

"각각의 책은 다 새로운 책이지요. 예전에 써본 적이 없으며, 써가면서 스스로에게 글 쓰는 법을 새롭게 가르쳐야만 하지요. 작가로서 너무도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너무도 많은 형편없는 문장과 생각을 지워버리고, 너무도 많은 가치 없는 부분들을 버리면서, 마침내 배우는 것이라곤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 작가란 직업은 참으로 겸허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해야겠지요."(폴 오스터, 185p)


"종종 글을 처음 쓸 때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글쓰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글쓰기가 충분히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필립 로스, 240p)


"제가 느끼기에 가장 좋은 인터뷰 방법은 저널리스트가 아무것도 받아 적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그리고 저널리스트가 나중에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 적는 것이지요. 대화에서 사용된 단어를 반드시 사용할 필요 없이 말이에요. 또 다른 유용한 방법은, 인터뷰를 받아 적되 인터뷰를 한 사람에 대하여 일정한 충직함을 갖고 받아 적어놓은 것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내용을 녹음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은, 녹음기가 인터뷰에 응한 사람에게 성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녹음기는 사람들 스스로 바보 멍청이가 될 때조차 기록하지요."(마르케스, 356p)


왜 쓰는가


"지식인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만 진실로 유용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당신이 극장에 있는데 불이 났다면 시인은 의자 위로 올라가서 시를 암송하면 안 됩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미리 어떤 일을 얘기해주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기능은 '우리가 이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 일을 당연히 해야 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에코, 53p)


"제가 글을 쓰지만 저 자신도 누가 범인인지 몰라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는 결론을 전혀 모르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답니다. 살인하는 장면이 처음에 나오면 누가 범인인지 모르지요. 그걸 알아내기 위해 글을 쓰는 거예요. 살인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겠지요."(하루키, 121p)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누가 햄릿과 한여름 밤의 꿈을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써서 이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예술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발자크, 호머는 모두 같은 것에 대해 썼으며, 만일 그들이 천 년, 이천 년을 더 살았더라면 출판업자들은 다른 작가들이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윌리엄 포크너, 437p)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들을 평가합니다. 예술가는 매번, 이번에는 글을 성공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요. 물론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만, 이렇게 실패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일단 자신이 품고 있는 이미지와 꿈에 필적하게 써내는 데 성공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자신의 목을 따거나 완벽함의 정점에서 자살을 위해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포크너, 437p)

1000509261001_1313105647001_Bio-Mini-Bio-Writers-Faulkner-SF.jpg 윌리엄 포크너

우리가 왜 무언가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대답은 윌리엄 포크너에게 나왔다. '소리와 분노'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에멧 틸 사건을 언급한다. 에멧 틸은 1955년 미시시피에서 사지가 잘린 채 죽은 흑인 소년이다. 틸은 지나가던 백인 여자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로 백인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시작이 된 사건이다.


포크너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 슬프고 비극적인 오류의 목적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남을 만한 존재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만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절망적인 문화에서 아이들을 살해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도달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또는 어떤 인종이든지 간에 우리는 살아남을 가치가 없습니다. 아니면, 아마 살아남지도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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