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정치 드라마가 종종 만들어지는 미국에서도 <웨스트 윙>은 독보적인 경우였다. 20세기 후반에 시작해 21세기 초반까지 일곱 시즌에 걸쳐 가상의 민주당 대통령인 바틀렛의 집권기를 다뤘다. 미국 민주당이 지향하는 정치 이념과 판타지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미국 정치 리더십의 작동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4년 연속으로 에미상 최우수 TV 드라마 시리즈상을 수상했고, 한국에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웨스트 윙의 두 번째 시즌은 최근의 한국 정치 상황과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 바틀렛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후반기를 다루는데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당연히 재선에 도전한다. 문제는 바틀렛이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인데 심각해지면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다. 바틀렛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이 질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하지만 재선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실을 숨길 수 없었고, 이 사실을 대중에 공개하기까지의 과정이 두 번째 시즌의 후반부 주요 내용이다. 바틀렛 대통령은 핵심 참모들에게 먼저 사실을 알리고,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특별검사를 선임해 자신과 백악관 참모들을 조사하게끔 한다.
대통령이 대중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이 사실이 여차여차해서 드러나게 되고 특별검사의 조사를 받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매우 익숙하다. 사실 닉슨의 사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선출 권력이 이런 과정을 거쳐 몰락한다. 차이가 있다면 드라마 속에서 바틀렛 대통령은 위기를 극복하고 재선에도 성공한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바틀렛처럼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둘의 차이가 뭘까.
바틀렛 대통령의 참모들은 진실을 숨기지 말라고 조언했다. 백악관 법률고문인 올리버 배비쉬는 바틀렛 대통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말한다.
"법무장관에게 지시해 특별검사를 선임하도록 하십시오. 아무 특별검사나 선임하시면 안 됩니다. 변호사 중에 피에 굶주리고 각하를 증오하는 공화당원이어야 합니다. 특별검사에게 무제한의 예산과 군대 같은 직원을 제공해야 합니다. 특별검사는 각하를 거쳐간 모든 문서를 조회할 겁니다. 단 한 번이라도 대통령 특권을 행사하시면 저는 떠날 겁니다. 눈곱만 한 도시의 검사보가 각하의 증언을 받겠다고 하면 바로 비행기를 타고 가셔야 합니다. 초선 의원이 각하의 증언을 듣고 싶어 하면 그 사람의 집 주방까지라도 찾아가셔야 합니다."
청와대의 민정수석이나 법무부 장관이 사건 초기에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을 했을까.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알 수 없다. 바틀렛 대통령은 배비쉬의 조언을 따르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분명하니까.
백악관 공보실장인 토비 지글러 역시 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하라고 대통령에게 직언을 던진다. 바틀렛 대통령은 토비 지글러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자 흥분한 채 소리친다. "이건 사적인 문제였어. 그리고 그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지켜달라"라고 말했다가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토비 지글러는 대통령의 말을 반박했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기로 보일 겁니다. 유권자들에게 직접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으신 것처럼 보일 겁니다. 보통 유권자들은 그 권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죠."
결국 바틀렛 대통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토비 지글러에게 사과한다.
올리버 배비쉬와 토비 지글러의 반응을 보면 이상적인 정치 리더십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잘못을 즉각 인정한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조사를 받는다. 특권은 내려놓는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사를 거부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특권 뒤에 숨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바틀렛 대통령과 달리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웨스트 윙>의 두 번째 시즌에는 선출 권력에 관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두 번째 시즌은 바틀렛 대통령이 저격범이 쏜 총에 맞는 것으로 시작된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수술이 필요했고 대통령은 전신마취 상태에 들어갔다. 바틀렛 대통령은 수술 전에 부통령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바틀렛 대통령이 자신의 병을 고백하자 토비 지글러가 이 문제를 언급한다. 안보가 위협당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전신마취를 한 몇 시간의 시간 동안 미국을 지휘한 게 누구였냐는 물음이다.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이 전신마취에 들어가고 부통령은 우왕좌왕하는 사이 국가안보실장과 국무부 장관에게 실제로 지휘를 내린 건 비서실장인 리오 맥게리였다. 이걸 두고 토비 지글러는 "그날 밤 이 나라에선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소리친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에게 국정 운영에 관한 서류를 넘긴 것이나 세월호 사고 당시의 7시간의 행적이 확실치 않은 것이나 모두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된다. 토비 지글러의 지적처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리오는 그나마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고 대중에게 명망 있는 정치인이었다. 하물며 대중이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 어린시절 친구라면 더욱 할 말이 없다. 토비 지글러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이 나라에선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