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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 상상된 순수성, 혼혈의 힘

열여덟 번째 리뷰_고종석 '감염된 언어'

by 이기자

지난 한글날이었다. 아수나로라는 청소년 단체가 올린 한글날 논평을 읽었다. 아수나로라는 단체는 "한글날은 우리가 단체로 다굴 당하는 날"이라며 "언어파괴가 아니라 언어문화"라고 항변했다. 조악한 수준의 논평이었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깔끔했다.

(아수나로 한글날 논평 - http://cafe.naver.com/asunaro/57476)


사실 나 역시 한글날만 되면 나오는 뉴스들이 불편하다.

'누가 한글을 파괴했나', '한글날 앞두고 자성론', '한글 파괴 심각' 등등..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인 한글이 파괴되고 있다며 여기저기서 빨간 경보등을 켜댄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청소년들의 은어가 한글을 파괴하고 있는가.


작가이자 언론인이자 기타 등등인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를 처음 접한 것이 대학생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6~7년은 된 듯하다. 그때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논쟁을 찾아보다 감염된 언어까지 손길이 닿았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고종석의 생각보다는 언어의 순수성 혹은 국어 순화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 더 인상적이었다. 한글날을 맞아 아수나로가 올린 논평을 읽으니 감염된 언어가 다시 생각나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고종석은 아수나로의 논평과 언론이 지적하는 한글날 언어 파괴 문제를 어떻게 볼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가 그가 살았던 18세기 영국에서 '영어의 타락'에 분개했다고 한다. 스위프트가 말한 영어의 타락은 축약형 단어의 등장이다. 우리 상황에 빚대면 매우 혐오스럽다를 '극혐'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스위프트가 지적한 축약형 단어를 하나 예로 들면 mob이다. 군중이라는 뜻의 단어 mob은 라틴어 성구인 mobile vulgus(야단스러운 군중)에서 온 것이다. 군중(vulgus)은 사라지고, 야단스러운(mobile)만 남아서, 더구나 그 축약형 mob이 '군중'이 된 것이다. 스위프트는 이런 영어의 타락을 교정해야 한다며 아카데미 창설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격렬한 논의 끝에 아카데미가 아닌 사전을 편찬하기로 한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면 "아카데미가 언어를 지도해 나간다면, 사전은 언어를 따라간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청소년들의 신조어에 대한 반감, 한글 파괴에 대한 우려가 불편한 데에는 사실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고종석은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혼혈은 그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151p)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 혹은 약어가 다른 세대와의 소통을 단절한다는 비판은 적절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새로운 언어를 비판하는 이들이 이런 소통 가능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순수한 언어, 한국어라는 상상 속의 개념이 그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들이 순수한 언어라고 부르는 한국어도 실상 수많은 외래어를 들여와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허공에 흩어지는 깃털마냥 무게를 잃는다.


"나는 위에서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7세기에 신라인들이 쓰던 언어가 진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진화는 압도적으로 외래 요소를 들여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문명어들은 외래 요소와의 혼합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혼혈은 그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98p)


메모


우리는 기원전의 코이네나 지금의 '민중어'나 둘 다 '그리스어'라고 부르면서, 무심코 그것들의 언어적 동일성을 전제한다. 고전 그리스어와 크게 다른 '민중어'의 공식 명칭이 '신헬라어'인 것이다. 2천 수백 년 동안 이 언어가 겪어온 환골탈태는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67)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 그런데 외래어를 비롯한 이물질이 한국어에 스며드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소통 가능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들이 외래어를 비판하는 것은 상상된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나는 위에서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것은 7세기에 신라인들이 쓰던 언어가 진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진화는 압도적으로 외래 요소를 들여오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문명어들은 외래 요소와의 혼합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혼혈은 그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었다.(98p)


현대의 시장경제에서 노동조합이 단 하나 남은, 법률로 보장된 독점적 권력이라는 것, 그것은 자원의 합리적, 효율적 배분이라는 시장의 근본적 기능을 방해함으로써 노동의 질을 낮추고 단체협약을 통한 임금 결정을 통해 물가에 나쁜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실업을 늘린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정비하고 사회보장의 망을 확충하는 것과 함께, 노동조합의 독점적 권력을 회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장과 경쟁의 미덕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조가 시장을 경직시키는 것처럼, 재벌 역시 시장을 경직시킨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시장의 몫을 줄여온 재벌도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115p)


복거일이 지적하듯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그저 강렬한 것이 아니라 거의 맹목적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그의 주장에 얼마간의 심리적 불편함을 느낄 수는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민족주의라는 주제는 차분한 논의를 불가능하게 할 만큼 민감한 주제다. 민족주의 이야기만 나오면, 민족주의 곧 애국, 비민주의 곧 매국의 등식이 수립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버린다.(119p)


그(복거일)의 이런 민족주의 비판의 배경에 있는 것은 그가 옹호하는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의 심리적 등가물인 개인주의, 세계시민주의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을 사람들로 만드는 특질들의 총체에 비기면, 민족들을 구별하는 데 쓰이는 특질들은, 많은 경우에,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고 얕다."(121p)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구비구비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151p)


소설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가 살고 있던 18세기 영어의 '타락'에 분개해서 아카데미를 만들자는 제약을 한 적이 있다. 그가 특히 걱정스러워했던 것은 축약형 단어들의 유행이었다. 군중이라는 뜻의 단어 mob은 라틴어 성구인 mobile vulgus(야단스러운 군중)에서 온 것이다. 군중(vulgus)은 사라지고, 야단스러운(mobile)만 남아서, 더구나 그 축약형 mob이 '군중'이 된 것이다. 흔히 이런 축약형 단어들은 20세기 저널리즘이나 신세대들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이미 18세기부터 유행했던 '언중의 지혜'였다. 스위프트는 영어의 이런 타락을 상설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영국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 대신 그들은 사전을 편찬했다. 사전들이 하는 일도 결국 아카데미가 하는 일처럼 언어의 규범을 세우는 일이지만, 아카데미가 언어를 지도해 나간다면, 사전은 언어를 따라간다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164p)


여기서 꼭 강조돼야 하는 것은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다.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 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 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2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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