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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대하는 사상의 자유까지 보장해야 한다"

열아홉 번째 리뷰_고종석의 낭만미래

by 이기자

'감염된 언어'를 읽은 김에 고종석의 짧은 책을 한 권 더 읽었다. 웅진 문학임프린트가 2013년 출간한 '고종석의 낭만 미래'. 출판사의 의도는 '지식과 책임'이라는 시리즈 이름에서부터 명확하게 나타난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당면한 여러 현안에 대한 분명한 의견과 태도를 묻겠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대담에 고종석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고종석은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다. 국가보안법, 통일, 낙태, 안락사, 종교, 자살, 애국심, 복지 등... 어느 하나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화두다.

최근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가장 공감할 만한 고종석의 견해 몇 가지를 적어본다.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지요. 그는 또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대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동의하는 사상에 대해서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파시스트들도 자유를 보장하지요. 자유주의자가 그들과 다른 점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입니다.(42p)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지적이 아닐까 싶다. 사실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열세인 정치상황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야당이나 자유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여당이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홈스가 전제 조건으로 내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것이다. 여당은 현존하는 위협인 북한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할 것이고, 야당은 눈에 보이는 북한이라는 존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것이 분명하다. 어느 정도의 논쟁은 불가피하지만, 고종석의 말대로 자유주의자라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반대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집착이다.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부자유한 사람들이 얻게 될 자유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나는 집단과 군중의 힘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회의적이다. 고종석은 오히려 공포를 느낀다고 말한다.


제겐 집단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집단의 폭력, 군중의 부화뇌동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굳이 편을 가른다면 '좌파'로 분류될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집단은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과 홀로 마주 서 있는 정신 속에서만 사상이 형성될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베유의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담론계에 유행하고 있는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저는 믿지 않아요. 루소의 일반 의지라는 말도 수상쩍게 여기고요.(13p)


시몬 베유는 "집단은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집단의 문제가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곳은 여의도, 정치판이다. 선거 때만 되면 우리는 '군중의 부화뇌동'이라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 지 체감할 수 있다. 고종석은 그 원인으로 이념에 따른 투표가 아니라 '어떤 인격'에 대한 호불호로 사람들이 투표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족'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족입니다. 유권자들이 이념에 따라 투표한다기보다 어떤 인격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투표한다는 거지요. 여기에는 박정희 집권 이래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가 강하게 개입돼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겠군요. 지금 한국 정치에서 상징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인격은 박정희와 노무현입니다. 둘 다 고인이 된 이 사람들의 지지자들은 이들이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어요. 그저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신을 그 사람 중 한 사람에게 투사해버린 거예요.(62p)


이 책에서는 고종석이 생각하는 당면 과제의 해법은 찾을 수 없다. 워낙 다양한 이슈를 다루다 보니 하나하나의 이슈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종석의 문제제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메모


제겐 집단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집단의 폭력, 군중의 부화뇌동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굳이 편을 가른다면 '좌파'로 분류될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집단은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과 홀로 마주 서 있는 정신 속에서만 사상이 형성될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베유의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담론계에 유행하고 있는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저는 믿지 않아요. 루소의 일반 의지라는 말도 수상쩍게 여기고요.(13p)


최선의 언어정책은 무정책이라는 게 제 신념입니다. 그냥 놔두면 되는 거예요. 어차피 영어는 이내 우리 사회에 깊이 파고들 겁니다. 그 점에서 복거일 선생은 외려 보수적 예측을 하셨어요. 그분은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는 데 몇 세기가 걸릴 거라고 보셨거든요. 저는 이번 세기 안에 영어가 실질적 세계 공용어가 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37p)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지요. 그는 또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대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동의하는 사상에 대해서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파시스트들도 자유를 보장하지요. 자유주의자가 그들과 다른 점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입니다.(42p)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족입니다. 유권자들이 이념에 따라 투표한다기보다 어떤 인격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투표한다는 거지요. 여기에는 박정희 집권 이래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가 강하게 개입돼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겠군요. 지금 한국 정치에서 상징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인격은 박정희와 노무현입니다. 둘 다 고인이 된 이 사람들의 지지자들은 이들이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어요. 그저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신을 그 사람 중 한 사람에게 투사해버린 거예요.(62p)


동성애 문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 따위가 다 종교와, 특히 기독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는, 가톨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보수적 개신교는 일관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자유주의적 가치에, 뭐 진보적 가치라고 해도 좋습니다만, 매우 적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믿음으로 대체합니다. 종교인들은 대개 너그러움과 익숙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교리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무엇이 합리적이고 개인들과 사회를 위해 좋은 것이냐를 생각하기보다는 무엇이 자신들의 교리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먼저 생각하지요.(122p)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말이 있지요. 18세기 영국 평론가 새뮤얼 존슨이 한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말을 흉내 내서,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라고도 했고요.(187p)


노동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오래도록 강력하게 좌파 담론을 지배해왔지만, 특별한 경우의 쾌락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면, 노동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귀찮은 일거리입니다. 다시 말해 고역이지요.(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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