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리뷰_카뮈의 '이방인'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사로잡힌 것은 순전히 이 한 마디 말 때문이다. 카뮈는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이 말에 부연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중략)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카뮈의 생각은 이방인을 연극으로 각색해보고 싶다고 한 독일의 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카뮈는 뫼르소에 대해 "그에게는 긍정적인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입니다.(중략) 뫼르소는 판사들이나 사회의 법칙이나 판에 박힌 감정들의 편이 아닙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곳의 돌이나 바람이나 바다처럼(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존재합니다."
나도 어머니의 장례식을 경험했다. 나는 뫼르소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그건 뫼르소와 달리 슬픔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라 슬픔을 느낄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의 말을 접하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는데, 그건 일종의 원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다른 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기억나기 때문에 일종의 원죄의식, 혹은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을 다시 읽는 내내 나는 뫼르소에 감정이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뫼르소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내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뫼르소는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수많은 곳에서 접하고 그의 일생과 가르침을 배우지만, 그리스도 그 자체에 감정이입할 수는 없다. 이건 신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뫼르소보다는 뫼르소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와 뫼르소의 형량을 낮추려고 노력하는 변호사에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감정이입됐다.
"그렇습니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검사와 "도대체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한 것으로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라고 외치는 변호사는 결국 같은 곳에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뫼르소는 검사와 변호사들이 닿지 못 하는 곳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나 또한 뫼르소가 서 있는 곳에 다가갈 수 없으니 검사와 변호사에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다. 뫼르소가 자기 자신의 사건에서 소외된 것도, 카뮈가 재판의 세계가 공격받고 있다고 쓴 것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의 표지에는 처음 소설(roman)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두 번째 판부터는 작가의 결정에 따라 이야기(recit)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로제 키요의 지적대로 이방인의 애매함과 모호성을 카뮈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의 첫 문장을 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뫼르소를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방인은 2015년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찌 보면 카뮈가 이방인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었을까. 다시 읽은 카뮈는 10여년 전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가슴 떨리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