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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시대를 향한
하버마스의 목소리

스물한 번째 리뷰_테러 시대의 철학

by 이기자

우리는 이론의 여지 없이 '테러 시대'에 살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이후 전 세계는 테러 시대에 진입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했지만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테러 시대가 도래한 배경들, 경제적인 이유(석유와 가스, 항만), 종교적인 이유(근본주의자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9.11 테러를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명명한다. 이미 걸프전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지만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조작된, 편집된 전쟁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전쟁의 현장들은 편집된 채 가정으로 배달됐다. 하버마스는 '진리는 전쟁의 최초의 희생자였다'는 말을 인용하며 걸프전과 걸프전을 중계한 미디어를 비판한다.


이 책은 9.11 테러 직후 하버마스와 자크 데리다라는 상이한 두 명의 철학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하버마스가 데리다를 신보수주의자라고 비판할 정도로 두 사람의 지향점은 다르다. 해체주의의 대가인 데리다와 근대의 기획을 완성하고자 하는 하버마스는 닿기 힘든 존재들이다.

데리다
진리는 전쟁의 최초의 희생자였다


그런데 이들이 한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공동선언문까지 냈다.

"유럽연합의 성공은 유럽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강화시켜주었다. 즉 국가적인 폭력 행사를 길들이고 억제할 방법이 있다면 - 유럽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도 -, 이는 오직 주권의 재량권에 상호 제한을 가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확신 말이다.(중략) 이들은 패자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승자들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승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스스로를 지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감이 촉진될 수 있었고, 세계적 내정에 대한 칸트적 희망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19p)




두 철학자는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테러란 무엇인가? 테러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테러를 막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버마스는 근대성의 회복에서 희망을 찾는다. 하버마스에게 근대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다. 하버마스는 종교적 근본주의를 거부한다. 근본주의는 권위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를 판단해줄 권위가 필수적이고, 이런 권위는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근대의 모습에 상반된다.


관용 자체가 불관용


같은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관용(똘레랑스)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민다. 관용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권위적이다. A가 B에게 관용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권위주의적인 일이다. 하버마스는 "관용은 일정한 경계 내부에서만 실행에 옮겨질 수 있으며 그 경계를 넘어서면 중단되기 때문에, 관용 자체가 불관용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버마스

이런 이야기들이 테러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회복이야 말로 근대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수많은 오류들을 수정해가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도 의사소통의 단절을 완화시켜주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유럽연합이 성공적인 모델인지는 의문이 남기도 한다.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공동선언문을 썼던 2003년과 지금은 유럽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두 철학자의 테러에 대한 성찰과 고민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빛이 바라지 않는다. 테러는 이제 전 지구적인 증상이 됐다. 이 책이 나온 2000년대 초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한국도 테러의 시대에 동떨어져 있지 않다. 테러집단이 한국인이나 한국 기업을 테러 목표로 삼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한국에 직접 테러 공격을 가하겠다는 협박도 이따금 들려온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테러의 본질에 대한 제대로 된 담론이 전무하다. 출간된 지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메모


여기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지구의 표면에 대한 공동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만약 그러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면, 그 순간부터 세계의 한 부분에서 발생하는 권리의 침해는 어디에서나 감지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우리가 영원히 평화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우쭐거릴 수 있다.(19P)


관용은 수세기 동안 이런 가부장적 정신 속에서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관행에서 벗어난 소수파의 행동에 대해 지배자가 다수파의 문화가 자기들 마음대로 기꺼이 "관용한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행위는 가부장적인 것입니다. 관용은 일정한 경계 내부에서만 실행에 옮겨질 수 있으며 그 경계를 넘어서면 중단되기 때문에, 관용 자체가 불관용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86P)


영웅이 존경을 받을 때마다 저는 도대체 누가 영웅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 단어를 이렇게 느슨한 의미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브레히트의 경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웅이 필요한 대지를 불쌍하게 여겨라!"(90p)


걸프 전쟁은 대중들에게 지상에서 실제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 최소한의 연속적 장면만을 보여줬을 따름이다. "진리는 전쟁의 최초의 희생자이다"라는 오래된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991년에는 전지구적 대중이 대중 매체의 조작에 내맡겨졌다. 이에 비해 2001년에는 전 지구적 대중이 '세계적인 목격자'가 됐다.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바로 이 사실이 9.11테러를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만들었다.(98p)


매스컴과 연계되어 있는 속도는, 정보를 수용하는 사람의 이해관계보다는 정보를 선택하여 분배하는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하버마스는, 자료에 대해 빨리 생각하고 빨리 평가하라는 압력은 일정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압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행위자들이 옹호하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행위자들의 외양을 토대로 하여 정치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113p)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내부에는 의사소통의 단절을 완화시킬 수 있는 확립된 통로가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심리 치료가 자신의 내면적인 침묵의 계기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상호 주관적인 공적 영역에서는 법률적 소송이 토론을 통해 더 이상 해결책을 찾지 못한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화는 의사소통적 폭력의 악순환 운동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는 의사소통을 강화시킴으로써 정의롭지 못한 분배의 무대를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시켰으며, 또한 세계를 승리자와 수혜자, 그리고 패배자로 완전히 나눠놓았다.(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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