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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게 듣는 '통치자 감별법'

스물두 번째 리뷰_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by 이기자

동양철학은 내게 미지의 세계다. 딱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까지가 내가 아는 동양철학의 전부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좋아한 덕분에 사기며 춘추에 대해 조금 전해 들은 정도만 있을 뿐, 노자며 공자며 맹자를 구분하는 것은 여자친구의 달라진 머리카락 길이를 알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최진석 교수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이런 나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동양철학 입문서였다. 노자와 공자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노자 사상을 쉽게 풀어준다. 도덕경 강독이라면 아무리 쉽게 풀어 써도 헤맬 수밖에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이 책은 철학서적이라기보다는 편하게 볼 수 있는 교양서적이다. 최진석 교수는 도덕경의 내용을 해설해주기 보다는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나보다 앞서 살고 더 많이 배운 누군가의 진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이 책을 읽고 노자에 대한 많은 점들을 새로 알게 됐지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노자의 사상, 그리고 노자 철학 자체가 정치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노자와 도가라고 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무욕(無爲無欲) 같은 말들만 떠올렸다. 자세히 공부한 적이 없으니 내게 노자는 무(無)의 철학, 일종의 허무주의나 자연으로의 회귀 같은 정도로만 생각됐다.


하지만 노자의 철학은 뿌리 깊은 정치철학이었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의 철학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인식적 혹은 가치적으로 천하를 장악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고 말한다. 뒤로 물러나라고 말하는 노자의 철학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와 같은 의미이지 뒤로 물러나 조용히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도덕경 7장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노자의 도덕경은 지금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노자는 도덕경 17장에서 통치에 무위가 적용된 단계를 보여준다. 노자가 얘기하는 최고의 통치 단계는 태상(太上)인데, 이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알뿐 실제로 느끼지는 못 한다. 백성들 자체가 세계이고, 세계의 변화는 백성들의 움직임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칭송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통치자라도 그 존재가 백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태상의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좋다는 평가가 내려졌다는 것은 이미 통치자와 백성들 사이에 일정한 선이 그어졌다는 의미다. 좋다는 평가 자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좋다는 것은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좋다는 평가는 그 기준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아무리 좋은 통치자라도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다음에는 백성이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단계, 비웃는 단계로 이어진다. 이런 단계의 차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신뢰다. 통치자와 백성이 서로 믿지 않게 되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최진석 교수는 도가의 기본 핵심을 "정부가 주도권을 모두 가지려 하지 말고 민간으로 대폭 내려보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국가와 통치자가 백성을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강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을 믿지 못하는 통치자와 국가는 백성들에게 자율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엄격한 기준을 세워서 거기에 백성들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이런 국가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도가의 기본 정신이다. 2015년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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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고인(孤人 부모가 없는 사람), 과인(寡人 남편이 없는 사람), 불곡(不穀 곡식을 번창하게 하지 못할 사람), 짐(朕 조그맣게 갈라진 틈 혹은 그림자와 같은 사소한 사람) 등으로 불렀다. 스스로를 낮춰 부른 것은, 고귀함이 천한 것을 기초로 이뤄졌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 때문에 통치자는 스스로를 고, 과, 그리고

불곡 등으로 낮춰 부르는 것이다

옥처럼 고귀해지려고 하지 말고 돌처럼 소박하라

-도덕경 39장


한국의 통치자들은 과연 자신의 자리가 비천함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을 지 의문이다. 대를 이어 통치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통치자들을 뽑는 백성들이 거대한 담론,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실재를 무시할 때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천하를 위한다는 정치는 과연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최진석 교수는 양주라는 고대 철학자를 빌려서 지적한다.

"실재가 이념을 생산하지 않고 이념이 실재를 지배하려 드는 것이 정치 현실의 가장 큰 모순이다."

노자 도덕경 13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거대 담론을 외치는 정치인들은 정작 현실 세계의 불편부당은 외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 한 몸 불살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는 정치인치고 실제로 그런 이가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투표권을 가진 백성들이 이런 감언이설에 넘어가 실재보다는 이념에 따라 투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념은 좌우의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지 않는 환상 같은 개념이다. 고종석의 지적을 빌려오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유권자들이 이념에 따라 투표한다기보다 어떤 인격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투표한다는 거지요. 여기에는 박정희 집권 이래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영남패권주의가 강하게 개입돼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겠군요. 지금 한국 정치에서 상징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두 인격은 박정희와 노무현입니다. 둘 다 고인이 된 이 사람들의 지지자들은 이들이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별 관심도 없어요. 그저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신을 그 사람 중 한 사람에게 투사해버린 거예요."(고종석의 낭만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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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교수는 노자를 빌려 거대 담론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일반명사가 되기보다는 고유명사가 되라는 조언이다. "만일 제가 거대 이념을 추종했다면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 제법 괜찮아 보이거든요. 이런 자족감을 기초로 하여 일상을 탄탄하게 해나가는 것이 또한 큰 성취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라고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이런 결론은 얼마 전 읽은 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존 그레이는 인간의 진보를 믿지 않는다. 진보라는 환상, 거대 담론에 우리가 사로잡혀 더 많은 고통과 아픔을 만들 뿐이다. 9.11 테러, 파리에서의 테러는 모두 진보나 구원 같은 실재하지 않는 믿음에 사로 잡힌 이들의 미친 짓일 뿐이다. 존 그레이는 "정치란 '인류의 종국적 목표'를 향해 가는 거대한 기획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악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임시변통들을 만드는 지혜와 용기"라고 정의한다. 거대 담론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를 소중히 하라는 노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 https://brunch.co.kr/@vitmania86/14)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기준 자체를 반대하는 노자의 철학 세계에서 과연 앎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돌에 부딪친 물이 크고 작은 포말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에 닿으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처럼 앎은 경계와의 만남에서 가능하다"고 말했다. 어떤 경계가 없는 한 앎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자의 인식대로 세상 만물이 가치 중립적이라면 과연 앎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난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친구를 본질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이 정당한 지 의문이 든다. 최진석 교수는 "정의는 반드시 무엇이라는 의문사를 가장 정확히 채워주는 내용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본질이므로 그 친구는 본질주의자"라고 말한다. 관계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랑에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생각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본질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여자친구가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자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뫼르소는 자신이 마리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진석 교수의 생각대로라면 뫼르소도 본질주의자가 되는 것인가. 이방인에서 내가 읽은 뫼르소는 그 누구보다도 전체주의와 근본주의적 세계관을 거부한 인물이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도 이런 세계관에 거부를 선언한 인물이다. 어떤 이유로 최진석 교수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한 친구를 본질주의자라고 명명한 것인지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는다.


메모


우리는 노자에게서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는 인사이트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이념의 수행자가 되거나 이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념을 만들라'는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혹은 사회가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바뀌어어야겠지요. 스스로 생산한 이념으로, 우리 토양에 맞는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45p)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완수한 인물로서 의미를 부여받아요. 이는 철기 발명으로 새로 촉발된 역사적 발전 추세를 일단락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시행한 많은 통일 정책은 소인들로부터 성장한 신흥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구 귀족들의 세력을 일소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된 것들이지요.(59p)


노자는 여기서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하고 통일돼야 한다고 보는 공자 식의 문명을 반대할 뿐이에요. 여기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안다"는 것은 정해진 미, 정의된 미,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미에 동조한다는 것입니다.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77p)


노자가 보기에 모든 가치는 중립적이에요. 그런데 공자식의 문명은 예라고 하는 특정 교화 체계를 저 위에 걸어 놓고, 백성을 모두 거기에 통합하려 합니다. 노자는 통합적 욕구를 발산하는 이런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아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한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해요. 왜냐하면 보편화된 이념 내지 체계는 그 내용의 선악 여부와 관계없이 기준 혹은 이념으로 작동해 세계를 구분하고,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지 못하는 한쪽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79p)


기준은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작용을 합니다. 배제와 억압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갈등이나 차등화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준을 전제하는 한, 극단적인 경쟁과 폭력의 가능성을 없앨 수 없다고 봅니다. 사회는 경직되고 자율성은 발휘될 길을 잃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보도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를 폐쇄적이고 경직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면, 그런 부정적 기능을 조장하는 '기준'이 건축될 길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런 인식에 도달한 노자는 바로 '본질'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102p)


노자가 "도는 개념화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진정한 이유는 변화와 관계 속에 있는 세계를 개괄하는 범주인 '도'를 고정하고 제한하는 기능을 하는 '언어'로는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가 거대하고 초월적이어서 개념화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123p)


피터 월리가 쓴 '철학가게'에는 다음과 같은 모차르트의 말이 나와 있습니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133p)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가버린 버스를 두고 '아이고, 저건 내가 탈 버스였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버스를 아예 내가 탈 버스로 규정하는 게 '소유적 태도'입니다. 이와 다르게, 다가오는 벗를 어떤 가치론도 없이, 버스 시간표에 따라 그냥 무심히 타는 것이 '무소유의 태도'이지요. 요약하자면,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139p)


통치자가 끊임없이 고귀하고 높게만 행세하려 들면 장차 실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귀함은 비천함을 뿌리로 하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 때문에 통치자는 스스로를 고(孤), 과(寡), 그리고 불곡(不穀) 등으로 낮춰 부르는 것이다

-도덕경 39장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

그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칭송한다

그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다음은 그를 비웃는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못한다

-도덕경 17장


백성들 자체가 '세계'이며, 통치자가 그 세계를 반영할 수는 없습니다. 즉 세계 변화의 흐름은 백성들의 움직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268p)


양주는 천하를 위한다는 정치가 실제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이념을 반영하거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묻습니다. 실제의 세계가 고정된 이념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습니다. 양주는 실재와 이념의 괴리가 정치 혼란에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간파합니다. 실재가 이념을 생산하지 않고 이념이 실재를 지배하려 드는 것이 정치 현실에서 가장 큰 모순이라 보는 거예요. 노자는 도덕경 1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정치인들은 보통 어떻게 말합니까? 이 한 몸 불살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런 정치인 중 조국과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요?(290p)


거대한 이념을 높이 보지 않고 내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삶을 구체적으로 잘 영위하는지에 집중했더니 좀 더 행복해지더군요. 만일 제가 거대 이념을 추종했다면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 제법 괜찮아 보이거든요. 이런 자족감을 기초로 하여 일상을 탄탄하게 해나가는 것이 또한 큰 성취도 이루게 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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