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리뷰_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예술가적 기질을 어디까지 인정해줘야 하는가?"
얼마 전 가진 독서모임의 화두였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의 삶을 놓고 독서모임 멤버들 간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겼다. 자기 주위의 모든 이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스트릭랜드의 행동들을 어디까지 용인해줘야 하는가. 또는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행동은 애초에 평범한 사람들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일인가.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는 말 그대로 황소처럼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세상에 없는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었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완성한 채 함께 사라진다. 나는 스트릭랜드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이들(그의 전 아내 등)이 그의 명성과 죽음을 이용해 아무렇지 않게 떳떳하게 살아가는 소설의 마지막 결론을 보고, 예술가들의 삶에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민적 삶과 예술가적 삶을 놓고 고민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토니오 크뢰거'는 경건한 시민적 세계와 관능적·예술적 세계 사이에서의 방황과 고민을 그린다.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과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한 셈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시민사회의 아웃사이더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이국적인 이름과 시에 대한 열망 속에서 보통의 시민들과 다름을 깨닫는다. 그는 우등생 한스 한젠을 짝사랑하고, 예술가적 기질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금발의 잉에, 잉에보르크 홀름을 마음에 둔다. 하지만 한스 한젠과 잉에보르크 홀름의 삶은 토니오 크뢰거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크나크 씨의 두 눈을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가! 그것은 전혀 교란시킬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 눈은 사물이 복잡하고도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자세는 그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누구든 그와 같이 그렇게 걸어갈 수 있으려면 우선 어리석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27p)
그렇다고 해서 토니오 크뢰거가 예술가들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갈등한다. 그는 우연히 길에서 소설가 동료인 아달베르트를 만난다. 아달베르트는 토니오에게 "나로 말하자면 이제 카페로 갑니다. 거기는 계절의 변화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지역이니까요. 아시겠어요? 말하자면 그곳은 문학적인 것을 위한 선경이며, 고귀한 착상들만을 떠올릴 수 있는 고상한 영역이란 말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카페는 시민적 삶과 분리된 예술가적 공간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토니오 크뢰거는 아달베르트를 따르지 않는다.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이것을 아달베르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카페로, 그런 동떨어진 영역으로 가버린 것입니다.(중략) 리자베타, 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내가 가끔 봄 앞에서 내 예술가 기질을 부끄러워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45p)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그보다 북쪽인 덴마크로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토니오 크뢰거가 자신의 여자친구인 리자베타에게 보내는 편지는, 토마스 만이 자신의 모든 독자와 세계에 알리는 선언이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만약 한 문사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106p)
토니오 크뢰거의 편지는 스트릭랜드의 죽음, 그리고 그의 필생의 대작을 불태워버린 유언과 엇갈리면서 교차한다. 나는 토니오 크뢰거와 스트릭랜드의 삶, 또는 예술관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각자 다른 곳에 서서 같은 것을 바라봤을 뿐이다.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이야기했다. 다만 서 있었던 곳이 다를 뿐이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난 그의 영혼은 이미 삶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다.(11p)
크나크 씨의 두 눈을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가! 그것은 전혀 교란시킬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 눈은 사물이 복잡하고도 슬프게 되는 곳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자세는 그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누구든 그와 같이 그렇게 걸어갈 수 있으려면 우선 어리석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27p)
봄은 가장 추악한 계절임에 틀림없습니다. 크뢰거 씨, 당신의 피 속에서 무엇인가가 점잖지 못하게 곰지락거리고 가당치도 않은 선정이 요동을 치며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데도, 당신은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나요? 그래서 나로 말하자면 이제 카페로 갑니다. 거기는 계절의 변화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지역이니까요. 아시겠어요? 말하자면 그곳은 문학적인 것을 위한 선경이며, 고귀한 착상들만을 떠올릴 수 있는 고상한 영역이란 말입니다.(42p)
예술가가 인간이 되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는 끝장입니다. 이것을 아달베르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카페로, 그런 동떨어진 영역으로 가버린 것입니다.(중략) 리자베타, 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내가 가끔 봄 앞에서 내 예술가 기질을 부끄러워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45p)
글쟁이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은 그것이 말로 표현되고 처리되었다 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법 없이 계속 삶을 영위해 갈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문학을 통한 온갖 구원에도 불구하고 삶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계속 죄악을 범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54p)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략) 만약 한 문사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10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