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네번째 리뷰_강만수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만큼이나 자신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긴 공무원이 있을까 싶다. 강 전 장관은 자신의 신념이나 소신이 뚜렷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여타 공무원들과는 결이 달랐다. 정치적인 이념뿐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도 확고했다. 이런 성격 탓에 정권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풍파를 많이 겪기도 했다. 그래도 한 정권의 경제정책 기초를 설계하고, 공무원으로서는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밟았으니 성공한 인생인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강 전 장관은 MB정부 시절의 모습만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고환율을 옹호하고, 법인세 인하에 앞장섰던 모습들이 대표적이다. MB정부 경제정책의 모토였던 '747(연간 7% 성장, 10년 내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비전'을 설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비판을 받았고 실제로 문제도 적지 않았지만,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를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빠르게 벗어난 데에는 강 전 장관의 공로도 있다고 생각한다. 강 전 장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언젠가 이뤄져야 한다. 워낙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강 전 장관만큼 한국 경제 전반에 골고루 영향을 끼친 공무원도 드물다. 단순히 MB정부라는 타이틀로만 그를 평가하기에 수십년간 공직에서 쌓은 다양한 이력들이 아쉽다.
강 전 장관이 2005년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은 그의 다양한 이력과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책이다. 부가세에서 IMF까지라는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강 전 장관이 맡았던 굵직한 한국 경제 정책의 뒷이야기들이 나온다. 누구보다 깊이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했기 때문에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한국 경제 발전이 정부 주도로 진행된 만큼 이 책을 통해 한국 경제 발전사를 요약해 볼 수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강 전 장관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여러 에피소드들도 흥미롭다. 예컨대,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부가가치세가 처음에는 거래세로 불렸다고 한다.
"부가가치세라는 이름이 길어서 국민에게 인상이 좋지 않으며 불편해 거래세로 하기로 결정했다가 6.25때 서울에 진주한 김일성의 북한 정부가 거래세라는 이름의 세금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와 다시 부가가치세로 하기로 했다."(26p)
소련 붕괴 직후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정영의 재무부 장관과 소련 오를로프 재무장관 간에 30억달러 지원과 양국의 협력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오를로프 장관은 가격을 배우기 위해 부하들을 서울에 보내고 싶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금리, 환율 등도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들은 레닌혁명 이래 74년을 가격 없이 계산으로 살아온 것이다. 돈의 가격이 금리이고, 외화의 가격이 환율이고, 나라 서비스의 가격이 세율이라는 것을 모스크바에서 새삼 알았다."(350p)
IMF에 대한 평가는 뼈아프다. 강 전 장관은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경제 관료들이 그 위기를 사전에 막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시각에서 풀어낸다. 경제 위기는 반복된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의 구조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정부의 입김에 따라 경제가 움직인다는 점에서 강 전 장관의 회고는 지금의 공무원들도 반면교사할 부분이 많다고 본다.
"정부가 빚을 갚지 못하도록 강제한 8.3 긴급조치는 우리 기업에게 부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닫게 했다. 자본을 충실히 하고 특정사업에 집중하던 우량기업들이 오히려 시장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도 되었다. 많은 대기업들이 사채 동결, 특혜성 자금지원, 대폭적인 조세감면이라는 편법에 의존해 성장했다. 구조조정의 어려움도 없었고 진정한 위기관리 능력도 상실하게 돼 1997년 외환위기를 맞는 먼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73p)
"세관은 수출입의 최일선에서 일하기 때문에 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첨병이다. 간부회의에서 여러 차례 수출입통계를 놓고 토론했다. 구조적으로는 8% 단일관세율, 단기적으로는 고평가된 환율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낮은 관세율과 높은 환율에서 무엇이든지 수입만 하면 장사가 되니 너도나도 수입에 나섰다."(125p)
"물가는 잡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라 긴축적인 통화관리, 평가절상, 낮은 관세율, 수입확대 등에 따른 종합적인 결과다. 공공요금 억제나 인위적인 통제를 통해 물가를 잡는다면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1996년말 재정경제원은 세 마리 토끼 중 물가라도 잡았다고 자축을 했다는데 물가는 모든 정책의 종합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물가담당국이 자축할 일도 아니다."(378p)
많은 사람이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살고 있다. TV에서는 정치나 사회 분야의 뉴스가 경제 뉴스보다 항상 앞에 나온다. 하지만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정치나 사회 뉴스보다 낮게 평가될 이유가 없다. 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 재무관이 체이스맨해튼은행을 통해 백악관과 전쟁방지를 교섭했다고 한다. 체이스맨해튼은행으로부터 이미 때가 늦었다는 백악관의 회신을 받은 일본 재무관이 마지막으로 본국에 '너무 늦었음(too late)'이라는 전문을 보냈을 때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이 개시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운명이 걸린 협상이 재무관과 은행을 통해 진행됐다는 점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강 전 장관은 정치 이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지만, 그의 일생의 족적을 따라 걸어보는 일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볼 만한 일이다. 한국 경제가 왜 이렇게 설계됐는지 그 설계자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고나 할까. 부동산에 대한 강 전 장관의 지적이 인상깊었다.
"부동산은 회전거래를 할수록 부가가치의 생산 없이 가격만 올라간다. 부동산은 부동해야지 동하면 만병을 일으킨다. 상품의 가격은 점에서 점으로 번지지만 부동산 가격은 점에서 면으로 번지는 속성에 따라 모든 수단을 동시에 철저히 시행해 실수요가 아닌 부동산 투기거래를 차단해야 한다."(78p)
장관을 지낸 이들은 거의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회고록이며 자서전을 펴낸다. 지금껏 읽은 전직 장관들의(물론 이 책을 썼을 때는 아직 장관이 아니었다) 회고록 중에는 단연 재미있고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