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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애정이 만들어낸 모옌의 판타지

스물다섯 번째 리뷰_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by 이기자

1968년 5월 1일 중국 지방의 작디 작은 다양란 소학교에서 춘계 운동회가 열린다. 일만미터 장거리 경주에는 모두 여덟 명의 선수가 나선다. 곱사등이 주충런 선생은 여덟 번째 선수로 경기에 나선다. 계급투쟁 속에서 어쩌다 보니 우파로 몰리고 사고를 당해 꼽추가 된 주 선생. 그는 곱사등이였지만 마을의 악당들을 훈계하고, 촌마을 농장에 수용된 우파분자들과도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곱사등이 주 선생이지만, 모옌은 경기에 나선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토끼잡이 몰이꾼 역할을 맡은 장거리 선수 리톄가 선두에 서고, 현 제일중학교 체육교사 천야오는 낙타의 얼굴을 닮았다. 그 뒤에는 다양란 소학교의 체육교수 샤오 왕 선생, 무장부대 출신의 시꺼먼 얼굴 사내, 베이징에서 인력거를 끌었던 장자쥐가 나온다.


이날의 장거리 경주는 막판에 경찰이 등장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만, 모옌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 그 자체다. 곱사등이 주 선생과 마을에 모인 우파분자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에 등장하는 인물들. 나는 모옌이 이들 모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느꼈다. 모옌의 소설에는 도구적 인물이 없다. 모옌은 중국의 관료주의와 경직된 계급사회에 분노하고 조롱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옌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의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모옌의 소설집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에는 3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소설인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에는 정년을 앞두고 강제로 퇴직당한 후 숲 속에 '연인들의 아담한 휴게소'를 차린 딩 사부가 나온다. 딩 사부는 궁핍한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폐차를 개조해 연인들에게 빌려주는 일을 시작했지만, 돈보다는 낯선 연인들을 구하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간 폐차 안에는 자살을 시도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던 낯선 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딩 사부는 한참이나 어린 경찰에게 면박을 당하고, 자신의 도제인 뤼샤오후에게도 한 소리 듣지만 속마음만은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딩 사부는 경직된 관료사회에 편입되지도 않고, 오로지 돈만 밝히는 세태에도 굴복하지 않은 인간적인 마음씨를 간직한 인물이다. 모옌이 발견한 희망이 바로 딩 사부가 아닐까.


작가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현실’이라는 이름의 침을 놔야 한다

모옌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때때로 꿈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과 무관한 꿈을 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현실’이라는 이름의 침을 놔야 한다. 그래서 우리 예술감각의 경락(經絡)이 항상 막힘 없이 잘 통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사회 사이의 그런 흐름을 잘 유지해야 한다.”(중앙일보, 2015.6.15)

250px-MoYan_Hamburg_2008.jpg 모옌

'소'에는 어린 소년 샤오뤄한과 늙은 두씨 영감이 나온다. 이들은 중국 사회, 깡촌마을에서마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이 둘은 거세한 소 세 마리를 하루 종일 몰고 다녀야 한다. 거세한 흉터가 덧나지 않게 하려면 소가 계속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세한 소의 불알을 볶은 소불알볶음은 마을의 생산대대 대장과 수의사의 몫이다. 이들은 한 입도 얻어먹지 못하고 그저 소들을 데리고 걷기만 한다. 그러던 중 소 한 마리가 결국 죽게 된다. 죽은 소의 고기를 먹은 공산당 위원회 간부와 그 가족들 수백명은 식중독에 걸린다.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것이다. 샤오뤄한과 늙은 두씨 영감은 소불알볶음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당 간부들이 신경도 쓰지 않는 소를 며칠 밤새 돌본 유일한 이들이다. 책에 나오듯 소가 중국 인민의 중요한 가축이요 생산도구라면, 중국 사회의 밥그릇을 지키는 이들은 당 위원회 간부가 아닌 깡촌마을의 어린 소년과 늙은 노인이다.

movie_image (1).jpg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행복한 날들'. 장이머우 감독의 작품이다.

마지막 소설인 '삼십 년 전의 어느 장거리경주'는 경직된 계급투쟁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와중에 마을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주 선생, 그의 존재는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주 선생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가짜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옌의 환상은 구름 위를 떠다니는 환상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환상이다. 모옌을 아시아의 마르케스로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마르케스와 모옌 모두 작품 세계를 논할 만큼 충분한 작품을 읽지 못했지만, 첫인상만으로 충분히 공감했다.


천명관의 추천사를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샌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 인물에 대한 연민에 코끝이 찡해지고 중국 관료사회에 대한 분노로 울컥 울분이 솟아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어우르는 넉넉하고 능청맞은 유머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소설의 경지로 치면 최고 경지이다."


메모


그는 자기가 평생 일한 공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날 뜨거운 불길이 하늘로 치솟던 작업 현장은 이제 외롭고 쓸쓸하게 그 자리에 엎드려 있고, 철커덩철커덩 시끄럽게 강철판을 두드리던 기계 소리는 이미 어제의 꿈이 되고 말았으며, 수십 년간 시꺼먼 연기를 토해낸 굴뚝도 지금은 연기를 뿜어내지 못하고 있다. 공장 구역의 텅 비어버린 바닥에는 불합격 판정을 받은 양철 깡통 무더기와 녹슨 콤바인이 가득했고, 노동자들이 드나들던 작은 식당 뒤꼍에는 술병만 가득 쌓였다... 그렇다, 공장은 죽었다. 노동자가 없는 공장은 완전히 무덤이다.(36p)


"어쩌자고 화장실에서 돈을 다 받는가?"

"사부님, 화성에서 뚝 떨어진 사람같이 말씀하십다그려. 지금 이 세상에 돈을 받지 않는 곳이 어디 한 군데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도제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돈을 받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긴 합니다. 만일 모든 걸 무료로 한다면 우리 같은 하류인생은 꿈속에서도 이런 고급 화장실을 써볼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다!"

"샤오후, 이 사부가 자네 덕분에 고급으로 오줌 한번 잘 쌌네."

"사부님, 그 말씀 정말 유머러스하네요!"(42p)


나는 세 마리 소를 바라보았다. 재수 없이 거세를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녀석들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두 눈망울에 글썽글썽 맺힌 눈물이 깊고 뼈아픈 비애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놈들은 앞으로 한평생 두 번 다시 암소 등에 올라타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의 눈망울에서 비애 말고 또 다른 감정 같은 것이 번쩍번쩍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지레짐작으로 그 섬광 같은 것은 인류에게 향하는 원한이 아닌가 싶었다.(132p)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우리가 고생고생하며 심은 양식거리로 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데, 그들이 어떻게 우릴 이렇게 대접할 수 있어요? 이게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겁니까?"

"네가 인민이냐? 또 내가 인민이냐? 너나 나나 모두 초목이나 다를 바 없이 무용지물인 쓸모없고 비천한 사람들이야. 쓸모없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데, 어떻게 인민 축에 들 수 있겠어?" 두씨 영감이 땅이 꺼져라 긴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야 그래도 좋은 편이라고 하겠다만, 솽지가 불쌍하구나! 솽지야, 솽지야, 지난해에는 네놈이 재미도 곧잘 보고 편안히 살아왔다만, 올해만큼은 호되게 고생 복이 터졌구나. 큰 루시나 작은 루시처럼 작년에 편히 살지 못하고, 올해 당하는 고생이 덜했으면 좋으련만. 하느님은 제일 공평하신 분이니까, 사람이나 짐슴이나 제 잇속만 챙길 줄 알고 손해 안 볼 생각은 말아야 할 게다."(2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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