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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들이 당신에게 닿는 순간

스물여섯 번째 리뷰_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by 이기자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김연수는 영화감독 조유진의 입을 빌어 사람과 사이의 소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조유진에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다. 그는 진남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 간의 소통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김연수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앞에서 갈등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는 심연의 속삭임을 들으면서도 그는 어떤 기적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김연수는 "가끔,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고 고백한다.


지은에게는 자신의 아이가 심연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날개였다. 그녀는 아이를 낙태하라고 말하는 조유진에게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나한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라고 말한다.아이를 강제로 입양당하고 지은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날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희망은 남았다.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나의 말들이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는 경우가 있다. 소설가는 그런 식으로 신비를 체험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2012년 여름에 나온 김연수의 장편소설이다. 1년간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됐던 작품이다. 열일곱살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생후 6개월에 미국에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가 큰 줄기다.


김연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오랜 화두인 소통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1980년대 남해안의 소도시인 진남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들, 이 사건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은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는 심연처럼 기억과 기록들 사이에도 어떤 심연이 존재한다.


카밀라와 정지은, 희재, 소설에 나오는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 같이 어둡고 조용하다. 카밀라와 유이치가 건너던 겐카이(玄海)가 행간 곳곳에 숨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설레게 하는 부분이 있다.


"관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네가 말한다.

"부탁이 있습니다."

"누구신가요?"

그가 묻는다.

"아, 저는 카밀라 포트만이라고 합니다. 한국 이름은 정희재입니다."

네가 너를 소개한다.

"희재라고요?"

"예, 희재입니다. 왜 그런시가요?"

"왜냐하면, 제 이름도 희재거든요."

그가 너를 바라본다. 너도 그를 바라본다. 벌써 오래전부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누구신가요?"

내가 물었다.

깊은 밤이었다.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니 남아 있었다.

"저는 정지은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아빠가 진남조선소의 타워크레인 위에 계십니다. 제발 우리 아빠를 주세요. 제발."

나는 지은을 바라봤다. 지은도 나를 바라봤다. 벌써 오래전부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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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지만 소립자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무엇이 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걸까. 글을 쓴 김연수조차도 정답을 확신하지 못한다. 김연수는 마지막에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당부한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메모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시내 쪽을 바라보는데, 그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였다. 흩뿌린 보석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다. 불빛이 참 예뻐요, 라고 좋아했더니 아빠는 아름다운 것들은 좀 떨어져서 봐야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으니까.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고향을 등졌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있었다.

126p


이곳 방글라데시에서 저는 수많은 개인사적인 불행을 만났습니다.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 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

148p


"제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날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중략)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274p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우리는 그 일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모든 균열은 붕괴보다 앞선다. 하지만 붕괴가 일어나야만 우리는 균열의 시점을 알 수 있다.

3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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