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홀로코스트를 겪고도 변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고

by 이기자

2017년의 첫 독서로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읽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인 데다 때마침 '우리 안의 괴물'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둘러 책을 펼쳤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 살던 유대인이다. 파시즘에 저항하다 붙잡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 1944년 2월부터 11개월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살아남았다. 구조된 자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책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집필한 이듬해인 1987년 4월 토리노의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해 유럽 여행 도중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넓은 공원 전체를 검은 비석이 뒤덮고 있었고 추모관은 지하에 있었다. 추모관에는 육백만 명에 이르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기록이 전시돼 있다. 수용소에서 발견된 그들의 유품-편지와 사진-이 있고, 이름들의 방이라는 전시관에서는 육백만 명의 희생자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고 있다. 이름을 모두 다 부르기까지 육 년 하고도 일곱 달, 스물일곱 날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한 번을 다 부르면 다시 처음부터 부르기 시작한다. 추모관 입구에 프리모 레비의 글이 적혀 있었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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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말을 담은 책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더 특별한 것이다.


레비가 이 책을 쓴 건 1986년이다. 그가 이 책을 썼을 때만 해도 독일은 여전히 분단 상태였다. 레비가 죽고 3년 뒤에 독일은 통일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 유럽인들의 피에 흐르던 양심의 면역 체제도 독일 통일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유럽에서는 극우주의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가는 길을 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성운동이 힘을 얻고 있고 프랑스와 독일의 대선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트럼프의 당선은 유럽의 극우주의 물결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레비는 이 책에서 독일이나 일본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이 다시 한번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적다고 적었지만, 이미 일본은 모든 것을 잊기로 작정한 것처럼 굴고 있다. 오랜 기간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단 스톤은 인류 문명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홀로코스트에 관해 알면 알수록 인류의 장래에 대해서 비관적이 된다."


홀로코스트나 수용소를 다룬 책들은 결국 인간의 본성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레비의 말처럼 하나의 실험실이었다. 수백만 명의 인간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관찰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실험이었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레비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최대한 냉철하게 풀어낸다. 그가 지켜본 인간은 결국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괴물의 모습이다.


책에는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을 탄압한 룸코프스키라는 유대인 권력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룸코프스키는 게토의 지도자라는 작은 권력에 취해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다. 레비는 룸코프스키가 유난히 특이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룸코프스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적는다.

우리 모두는 룸코프스키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의 모호함은 진흙과 영혼으로 빚어진 혼합체인 우리의 타고난 모호함이고, 그의 열망은 우리의 열망이다. "나팔 불고 북을 치며 지옥으로 내려간" 우리 서구 문명의 열병이다. 그의 비참한 장신구는 사회적 위신을 표상하는 우리의 상징에 대한 뒤틀린 이미지이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79p

수용소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학살한 SS 대원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람들은 SS 대원이나 수용소의 감시자들을 '고문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레비는 이 표현에 반대했다. 고문자라는 말이 주는 독특한 뉘앙스 때문이었다. 고문자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악마적이고 뒤틀린 인간상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는 유대인을 학살한 군인들 대부분이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악의 평범성은 언제나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수백만 명이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죽어간 것을 알고 있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제주와 광주에서도 지난 세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경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경악이라는 건 그 사건들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반응이다. 마치 나는 그 일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연민의 감정을 담아 희생자들을 바라볼 뿐 죄책감을 소거시키는 인간 특유의 자기방어 본능이다. 레비의 첫 번째 책 <이것이 인간인가>가 독일에 출간된 직후 독일의 독자들이 레비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말이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히틀러나 전두환 같은 소수의 독재자가 아니라 평범한 수준의 악을 가진 다수의 대중이다. 나는 대중을 믿지 않는다. 민족도 국가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의 정체성은 특정 민족과 특정 국가에 종속돼 있다. 그러니 매일 같이 불안한 시선으로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성난 표정으로 정의를 외치는 나의 이웃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한 명의 잘못된 권력자는 끌어내리면 그만이지만 스스로를 정의라고 착각하는 다수의 대중은 제어할 방법이 없다. 홀로코스트를 묵인한 독일과 유럽의 대중은 그들이 잘못된 일을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단은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시몬 베유의 말은 오랜 사색의 결과물이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를 읽으며 가슴이 서늘해진 적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적은 책에서 한강은 갑자기 2009년 1월을 이야기했다.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우리는 모두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과 용산의 희생자들을 잊었다. 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지도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망각으로 자신을 무장한 채 눈 앞에 보이는 정의의 고지로 달려간다. 발아래 누가 밟혀나가든 신경 쓰지 않는다.


레비는 "부담스런 기억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아예 기억의 진입을 저지하는 것, 즉, 경계를 따라 방역선을 치는 것이다. 기억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억이 기록된 뒤에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교훈 중에서도 특별히 유용한 교훈 하나는 이것이다. 인간은 홀로코스트를 겪고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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