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관련한 문제에 해결책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맹 가리의 인간의 문제

by 이기자

로맹 가리는 공쿠르상을 두 차례 받은 유일한 작가다. 흔히 알려진 사실로만 보면 유대계 프랑스 소설가지만 그의 정체성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혁명 이후에는 폴란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프랑스 남부 니스에 정착했고 전쟁이 일어나자 폭격기를 몰고 나치와 싸웠다. 전쟁 이후에는 외교관이 되어 불가리아, 볼리비아, 미국 등지에서 수십 년을 지냈다. 그는 스스로를 폭발하지 않은 카멜레온에 비유했다. 그러나 1980년 12월 2일 입 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스스로 폭발했다.


카멜레온을 파란 양탄자 위에 놓으면 파래지고 노란 양탄자 위에 놓으면 노래지고 빨간 양탄자 위에 놓으면 빨개지고 체크무늬 양탄자 위에 놓으면 미쳐버려요. 나는 미치지 않으려고 작가가 되었어요. 나는 폭발하지 않은 카멜레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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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지만 로맹 가리의 책만은 사서 읽으려 한다. <인간의 문제>는 국내에 출간된 로맹 가리의 첫 산문집이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것만큼이나 적극적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했고 정치·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간의 문제>에는 1957년부터 1980년까지 로맹 가리가 발표했거나 그를 인터뷰한 글 33편이 들어있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인간'이라는 명사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젠가 우리를 찾아올 진정한 '인간'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미 '인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간 걸까. 아우슈비츠와 수용소에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시체 속에 우리가 기다리던 '인간'도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 로맹 가리의 산문집에서 특별히 음미해볼 만한 글을 열 개만 발췌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반대합니다.

나는 절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반대합니다. 이 표현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알베르 카뮈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는 진리의 독점권을 가졌다고 믿는 모든 정치 체계를 반대합니다. 모든 이념적 독점에도 반대합니다. (20p)
과연 인간이 나치인지 아닌지 알아볼 때도 되었습니다. 나치즘이 패배했지만 우리의 승리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점차 도달했으며 그것이 끔찍하지만 진정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는 순간이 아니었는지 자문할 수 있습니다.(32p)
라파엘 마타란 한 인간이 지상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암으로 흉측하게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다가 아프리카에서 스러졌다. 자연보호 구역에서 인간으로서 할 일이라고 믿고 있는 일을 하며 코끼리와 짐승을 숲에서 구하려고 애썼다. 인간은 오로지 파괴적 재능을 보다 높이, 자유롭게 발휘하려고 그 숲에서 나왔다. 라파엘 마타는 인간의 가장 최선의 모습, 즉 타자의 사랑을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당연히 그는 살해당했다. 누구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는 한 인간이 살해당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 이전에 고문당하지 않았다는 것에만 그저 놀랄 뿐이다. 모두에게 말했듯 낙담할 이유가 없다. 몇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죗값을 치를 것이다. 수소폭탄을 통해 정점에 도달한 인간에게 나는 경의를 표한다.(64p)


우리 시대에는 한 인간이 살해당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 이전에 고문당하지 않았다는 것에만 그저 놀랄 뿐이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한 시인, 소설가, 철학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부디 누구인지 이름을 대보라.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과신하는' 자들은 가스실이나 오랑의 거리에서 인간을 '해소'하고 말핬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어떤 과학이나 이념이나 절대적 진리로도 포착하거나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카뮈는 알았다.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능력이 없다. 인간에게 걸맞은 문명이라면 그 문명 스스로 인간에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93p)
미국에서 무기 수집의 중요성과 숫자, 그것은 경악할 만하죠. 마치 남성성의 상징처럼 여겨요. 사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흉측한 논리예요. 진정한 남성성은 기계를 매개로 한 것보다 자신의 팔에서 발현된다고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무기에 대한 열정은 성적 불만의 징후라고 봐요. 성적 차원에서 자신감이 없을 때 남자는 무기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죠.(163p)
미국에서 광고와 부의 항구적 과시가 합쳐져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박이 너무 강한 나머지 마치 약탈과 강도로 초대하는 것과 같다. 자극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구매하세요! 소비하세요! 이것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이것이 최신 상품이고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꼭 필요합니다! 자, 당신만을 기다리는 상품입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빈민굴의 어떤 꼬마가 이런 호소에 넘어가 기회가 생기자마자 약탈 행위에 뛰어든다면 어떻게 그런 아이에게 짐짓 분개한 표정을 꾸밀 수 있겠는가?(181p)
에로티즘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감미로운 묘사를 읽기만 했다면 그것은 에로티즘이고, 가격표를 본다면 그것은 포르노가 된다.(240p)


오늘날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누구도 그런 일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질, 무장강도, 공권력의 실수, 납치, 테러, 유괴가 있는데 이 분야도 '좋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면 부적절할 것이다. 1974년보다 1975년에 큰 개선이 이뤄졌다. 너무 개선된 나머지 예컨대 오늘날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누구도 그런 일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퇴폐는 없다. 같은 방향으로 앞으로 몰려가는 인파가 있다. 근육질에다가 무장을 하고 단호한 태도로 몰려가는 인파는 "나는 여전히 더 많은 것, 특히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원한다"라는 단호한 구호에 전적으로 집착하는 무리다.(241p)
도스토옙스키는 천재지만 누가 그에게 혹은 셀린에게 세계의 운명을 맡기려 들겠어요? 알다시피 소설 작품은 존중할 만한 사상을 배출하거나 옹호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은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에 달려 있고 그 대목에서 모든 것이 대학살로 이어질 수 있어요. 내 작품에서 정당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사용되는 수단은 적어도 추구해야 할 목표만큼이나 중요해요. 문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수단에 달려 있어요.(259p)
지옥에 벽이 있다면-지옥이란 단어는 경계선이란 개념을 배제하므로 지옥에는 벽이 없다-나는 레지스탕스가 했을 법한 첫 번째 일은 낙서라고 말하겠다.(3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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