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이역입니다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by 이기자

어쩔 수 없이 취해버리는 날이 있다. 절대로, 반드시, 결단코 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술자리에 앉았건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바지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날. 그런 날이 있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마시고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 시간을 확인한다. 혹시 하는 마음에 늘 지갑을 두는 서랍장 위로 눈길을 던지고는 다시 침대에 눕는다. 그러고는 전날의 술자리를 돌아본다. 무엇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취한 걸까. 그렇게 다짐을 하고도 왜 그렇게나 술을 마셨나.


<안녕 주정뱅이>는 20년차 중견 소설가 권여선의 다섯 번째 단편집이다. 그녀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긴 수작. 권여선은 동인문학상을 받은 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개인적 의미로 술은 시간을 분절(分節)하는 방식이라고 봅니다.


시간을 분절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권여선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시간을 살다가 술을 마시면 그 순간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끊어진다. 마치 '작은 죽음'이 지나간 느낌이다. 술은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이역"이라고 보충 설명한다.


<안녕 주정뱅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현실에서 빗겨나 있다. 그들은 환상을 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죽음을 목격했거나 죽음에 다가가고 있거나. 그리고 하나 같이 술을 마신다. 죽어라 마시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마시기도 하고 천천히 마시기도 하고 습관처럼 마시기도 한다. 술을 마시면서 끊임없이 상상하고 읊조리고 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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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지독한 현실 세계에서 술은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틈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틈을 발견하고 넓혀나간다. 역설적이게도 그 틈이란 '작은 죽음'이다. 작은 죽음이 모여 큰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권여선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결코 행복해지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죽거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난다. 그럼에도 이 지독한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위안을 얻었다. 왜 일까. 무엇이, 무엇 때문에 이 지독한 소설에서 위안을 얻는 걸까.


인간이 가진 몇 가지 속성은 그 자신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위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적응하고 살아남았다.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았던 몇몇의 생존자를 제외하면 '수용소'라는 극한 환경에 적응한 자들이 살아남았다. 프리모 레비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동물들의 세계에 적응했고 살아남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이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는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었고 2017년의 인간은 1945년의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모든 조건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곳이었고 현대 사회도 어찌보면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황금주의나 생명 경시, 종교의 타락 같은 부분에서는 현대 사회도 아우슈비츠에 도전장을 들이밀 만하다. 이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 권여선의 소설 속 등장인물, 그런 이들은 매일 작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어간다. 환경에 적응한 생존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인물들에게 실패자, -중독자, 탈락자 같은 말들을 붙인다. 아우슈비츠의 수인들이 팔에 새겨진 문신을 평생 안고 살아가듯이 현대 사회의 실패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여튼간 이 책을 읽고 머리에 든 생각은 '위안'이라는 단어였다. 이 책의 해설을 쓴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위로를 할 때는 이런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예컨대 '그는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나 '걱정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같은 말들은 내 쪽의 끝을 놓아버리면서 던지는 밧줄이다. 반면에 '당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알겠어요'와 같은 말은 한쪽 끝을 쥐고 던지는 밧줄이어서 상대방이 믿고 붙잡을 수 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것은 막연한 '거예요'와 분명한 '알겠어요'의 차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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