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잔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시작된 촛불집회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순간이었다. 작은 촛불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역사에 하나의 큰 이미지로 남게 됐다. 촛불집회가 남긴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촛불을 끄는 순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촛불을 끄는 순간이 촛불집회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광장이 어둠에 잠기자 집회 참가자들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연대의 힘을 체감한 덕분일 것이다. 반대로 어둠에 잠긴 광장에서 유일하게 불이 꺼지지 않은 곳들, 정부청사와 대기업 소유의 빌딩들이 내뿜는 강한 빛은 광장의 목소리가 무엇에 대항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알려줬다.
광장에 모인 촛불을 반딧불에 비유할 수 있을까. 프랑스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광장에 모인 촛불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를 통해 '반딧불'을 꺼낸다. 반딧불은 약한 빛이다. 아주 어두운 밤에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약한 빛이다. 권력자들을 감싸는 거대한 조명들에 비하면 반딧불의 약한 빛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반딧불은 분명히 존재한다. 파솔리니는 네오파시즘의 부상에 좌절하며 반딧불의 소멸을 선언했지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선언을 거부한다. 그는 "혐오스러운 역사의 현재에도 불구하고 출현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에게 반딧불은 권력자를 비치는 화려한 조명과 권력자의 적들을 찾아내려고 강한 빛을 뿜어내는 서치라이트의 반대 개념이다. 반딧불의 약한 빛은 민중이다. 산업화와 소비주의의 시대에도 소멸하지 않은 채 어딘가에서 출현하곤 하는 민중이다. 반딧불은 소멸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태양이 떠 있는 시간에 먼 우주에서 날아온 별빛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별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태양빛에 가렸을 뿐이다. 우리가 약한 빛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어두운 밤, 캄캄한 밤이다.
반딧불이의 약한 빛은 성애를 위한 빛이다. 반딧불이는 문명에 밀려 절명의 위기에 빠진 지금도 구애를 위한 반짝임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춤을 춘다. 반딧불이가 만든 춤의 잔광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희망이 있다는 선언이다.
<반딧불의 잔존>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솔리니와 아감벤, 자크 랑시에르, 한나 아렌트, 발터 벤야민, 조르주 바티유를 알아야 한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그러나 반딧불의 비유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눈 앞에서 지켜본 촛불집회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촛불집회의 촛불을 반딧불로 볼 수 있을지, 파솔리니의 선언대로 반딧불은 소멸한 것인지, 반딧불이 소멸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이 모든 질문이 하나 같이 중요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